- 제텔카스텐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는 1512년에 쓴 교과서 <풍부함에 대해서 De Copia>에서 기억과 읽기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모든 학생과 교사들에게 공책 정리를 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공책을 주제별로 분류함으로써 "기록해 놓을 만한 어떤 대상과 마주치더라도 적합한 섹션을 찾아 적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에라스뮈스는 암기를 위한 암기나 사실 관계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무턱대고 외우는 식의 암기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에게 암기란 종합의 과정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고, 독서에 대한 더 깊고 개인적인 이해로 이끄는 과정이다. -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290p.
"기록해 놓을 만한 어떤 대상과 마주치더라도 적합한 섹션을 찾아 적을 수 있을 것."
혁명적인 메모 방식을 소개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제텔카스텐>이 떠올랐다. 마법 같은 제텔카스텐을 원하는 사람들은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명언, 번뜩이는 아이디어, 책의 내용 등. 하지만 많은 이들이 실패했다. 왜냐하면 옮겨 적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미 출판되었거나 구글에 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적어 두기만 한다면 창의성과 판단의 혜택을 볼 수 없다.
고전 역사학자인 에리카 럼멜(Erika Rummel)은 "배우고 곰곰이 생각한 대상에 대해 스스로 요약하거나 내면화해야지, 모델로 삼은 작가의 바람직한 면을 무조건 재생산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암기는, 기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멀며 완전하게 사고를 이용하는 것이다. 럼멜은 이것을 "창의성과 판단이 요구된다."라고 적었다. -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291p.
이어서 로마인 세네카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벌을 모방해 우리가 행한 다양한 독서에서 수집한 것을 모두 각각 별도의 방에 저장해야 하는데, 무엇이든 따로 보관했을 때 더 잘 저장된다. 이 경우 타고난 재능이라는 자원을 성실하게 적용함으로써 우리가 맛본 다양한 종류의 꿀을 섞은 후 하나의 달콤한 물질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같은 과정을 거친 후 이 물질은 그 원재료의 출처가 명확하지만 원래 상태와는 매우 달라 보인다."
이후 에라스뮈스의 조언은 '비망록'으로 불리게 된 공책과 르네상스 교육의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19~20세기를 거치면서 암기 학습의 인기가 떨어졌고, 진보 교육자들은 암기를 덜 계몽된 시대의 흔적이라며 폐지했다. 이 부분이 핵심 아닐까? 주입식 교육과 암기가 창의력을 제한한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들어왔다. 영어단어를 수 십 번씩 반복해서 쓰고 칠판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말이다. 필기, 즉 노트정리는 과거 진보 교육자들의 말처럼 덜 계몽된 학습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라스뮈스와 럼멜, 세네카가 말하는 필기는 옮겨 적는 행위가 아니다.
제텔카스텐 메모법의 핵심은 요약과 '자신의 생각'을 적는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이 글을 예로 들어보자. 진보 교육자들이 폐지시킨 덜 계몽된 필기란, 초록색 문단처럼 그대로 옮겨 적는 행위를 말한다. 자신의 생각이 없다. 옮겨 적는 행위는 뇌 과학에서 말하는 '인출 훈련'이 아니다.
필기는 리뷰, 즉 반복행위다. 그중에서도 손글씨 필기는 제법 효과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효과'란 암기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기억력이다. 하지만 많은 실험에서 '반복'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훈련이 '인출'이고, 인출이란 말하기와 글쓰기다. "쉽게 설명할 수 없으면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필기는 초록색 문단만 적어 두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은 지금 읽고 있는 여기다.
"그 원재료의 출처가 명확하지만 원래 상태와는 매우 달라 보인다."
창의력의 단서는 "원래 상태와는 매우 달라 보인다."라는 말에 숨어있다. 제텔카스텐에 실패한 사람들이 빠트린 것이기도 하다. <제텔카스텐>의 저자가 현대의 교육과 업무 시스템 속에서 제텔카스텐을 적용시키기 힘들다고 언급한 부분과도 상통한다.
필기 분량이 공책 다섯 권이나 되는 시험이 있었다. 잘 정리된 글씨를 훑어보며 만족스러워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구나."라면서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남은 게 없다. 공책 다섯 권 안에 나의 생각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세상은 '생각 없는 필기'를 시험대 위에 올려두고, '생각 있는 사람'을 원한다. 이 모순을 헤치고 나아가는 방법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선택했다. 수험생처럼 조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각이 담긴 필기를 추천하고 싶다. 생각 없는 필기는 시험 점수를 올려주지만 생각을 올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