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술어.
공감 능력과 감수성의 관계가 궁금했다. 왜 감수성이 많은 사람들은 공감을 잘할까? 단서는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에서 읽은 '감정에 이름 붙여주기'에 있었다. 예를 들어 "짜증 난다."는 감정을 표현할 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서술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는 "가슴이 탄다.", "목이 멘다.", "속이 끓는다.", "눈물을 삼킨다.", "머리가 지끈거린다."처럼 여러 가지 서술을 하는 반면, 후자는 이 모든 감정을 "짜증 난다." 한 가지로 서술한다.
감수성 있는 글쓴이는 감정마다 이름을 붙이고 그것의 감각을 기억한다. 따라서 표현할 때에도 드러난다. 감수성 있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100가지 요리를 내놓고 100가지 요리를 즐긴다. 반면 감수성이 부족한 글쓴이는 갈비탕, 부추전, 떡갈비, 비빔밥을 '한식'이라는 한 가지로 서술한다. 감수성이 부족한 독자는 요리가 100가지든 10가지든 자신의 '작은' 분류 체계로 편입시킨다. 감수성이 부족하면 공감을 주고받지 못한다.
감수성 훈련이 부족하면 갈비탕과 부추전의 맛 차이를 모른다. 잘 차려진 요리를 맛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맛의 차이를 느낄 것이다. 그것을 다시 토해낼 때 "짜증 난다."는 서술은 더 이상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말은 쉬운데 학습으로는 습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나마 떠오르는 게 독서뿐이다. 미디어는 대중이 타깃이다. 대중의 연령대는 대략 15세 전후를 의미한다. 중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셀 수 없이 증명되었다. 미디어는 가능하면 "짜증 난다."로 서술한다는 의미다. 게다가 모든 감정을 서술할 필요도 없다. 배우의 표정, 분위기, 행동 등 감정을 전달할 수단이 많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늘었다.
감수성을 막연하게 태생적 요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IQ와 달리 EQ는 훈련이 가능하다고 한다. 감수성을 훈련한다는 발상이 인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감정을 느끼는 회로가 태생적으로 결여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가슴이 아린, 속이 끓는, 심장이 쑤시는 감정은 분명 다르다.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은 그것들 모두를 "화가 났다."로 통일시켜 표출했을 뿐이다. 어쨌든 감수성 있는 글쓰기가 재능이 아니라는 단서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