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마의 변호인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은 사람들이 논리적 추론에서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로 확증편향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실험 이야기는 책 <바른 마음>을 참고했다.
실험자 : 숫자 2 - 4 - 6에는 '어떤' 규칙이 있습니다. 임의의 숫자 배열을 말씀하시면 그것이 규칙에 맞는지 아닌지를 알려드립니다. 저의 대답을 추론하여 규칙을 찾는 게임입니다.
피험자 : 120 - 122 - 124는 규칙에 맞나요?
실험자 : 맞습니다.
피험자 : 짝수네?
실험자 : 땡!
피험자 : 3 - 5 - 7은요?
실험자 : 맞습니다.
피험자 : 35 - 37 - 39는?
실험자 : 맞습니다.
피험자 : 2씩 커지는 숫자군요?
실험자 : 탈락!
사람들은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는 데에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고, 어떤 이는 복잡한 가설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가설에 위배되는' 숫자 조합을 제시하지 않으려 했다. 1/2/3(맞습니다)과 3/2/1(아닙니다)만 제시해 보아도 규칙의 정답이 점점 커지는 숫자의 조합임을 알 수 있었는데 말이다.
실험이 난센스 퀴즈였거나 학습으로 교정되는 것이었다면 확증편향 이론은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피험자의 의식을 따라가 보자. 처음 가설은 짝수였을 것이다. 따라서 120/122/124를 제시했다. 규칙이 짝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피험자는 '2씩 커지는 숫자라는 새로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3/5/7을 제시했다. 새로운 가설의 확증으로 35/37/39를 제시했다. 질문의 방향이 '자신이 세운 가설'을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해 자신의 가설에 위배되는 조합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피터 웨이슨이 말하는 확증편향이다.
확증편향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교정이 가능할 것 같아서다. 유사한 개념들을 떠올려보자. 자기 충족 예언, 인지부조화, 고정관념 등은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교정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성은 남성보다 수학을 못한다."라는 고정관념에 관해서, 남성과 여성의 뇌에서 수학적 능력의 차이를 증명한 실험은 없었다고 알려주거나 여성 수학자들의 업적을 제공하면 고정관념을 깰 수 있다. 하지만 수학시험에 관한 고정관념을 깬 것이지 고정관념이라는 '사고방식'을 교정한 것이 아니다. 확증편향 실험도 마찬가지다. 2/4/6 숫자 배열 퀴즈의 정답을 학습한다면 유사한 퀴즈에서는 확증편향을 배제하겠지만 그것을 교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피험자 중에는 복잡한 가설을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관한 단서는 데이비드 퍼킨스의 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 데이비드 퍼킨스는 여러 계층의 피험자에게 사회적 쟁점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요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어느 안건에 찬성한다면 반대의견보다 찬성 쪽 논거를 더 많이 제시할 것이다. 고학력자라면 더 많은 논거를 언급할 것이다. 실험 결과도 일치했다. IQ가 높은 사람은 복잡한 가설을 내세울 뿐 확증편향은 모든 계층에서 발생했다.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받던 이들이 오히려 더 정교한 확증편향을 만들어 낸 것이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도 다음과 같은 말로 확증편향을 경고했다. "투자자들은 모든 새로운 정보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 결론을 바꾸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한다."
어떻게 해야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을까? 우선 확증편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첫째다. 그리고 완벽히 교정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설에 심취해선 안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라는 마음가짐도 필수다. 열린 마음! 하지만 이것들은 교과서 같은 이야기다. 현실성 있는 방법은 '악마의 변호인'이라는 시스템이다. 집단 의사 결정 과정에서 악역을 심어 놓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사람은 무조건 반대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집단의 확증편향을 견제할 수 있다. 아쉽게도 혼자서는 확증편향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확증편향의 개별적 사례를 학습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소설 작가 중에는 학자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는 게 직업이다. 확증편향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직업임에도 확증편향에 고스란히 노출된, 아이러니한 위치에 있다. 앞서 IQ가 높은 고학력자는 정교한 확증편향을 만들어낸다고 언급했다. 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같은 실험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자신의 가설에 유리한 부분을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좋게 표현하면 설득력이 강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누구의 가설도 맹신해서는 안된다.
이글도 확증편향이다. 확증편향은 존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가설을 입증하려 노력 중이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워런 버핏과 데이비드 퍼킨스를 언급했다. 확증편향을 반박하는 이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찾아내서 나의 가설을 위협하고 싶지 않았다.
확증편향을 경계할수록 가설 자체를 믿지 않을 것이다. 어쩌라는 걸까? 괜찮은 가설을 세우려면 이중인격이 되어서 '악마의 변호인'을 고용해야 할까? 표현만 다를 뿐 자기 객관화와 같은 원리다. 좋은 글은 지식과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열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열린 마음이란 자신의 가설에 위배되는 숫자 조합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겸손이나 자기 성찰이라는 원론적 개념으로 돌아간다. 최근 관심이 많아진 사회문제도 돌고 돌아 도덕이나 공동체 같은 개념이 근원인 것을 보면, 옛날 것이라 외면받는 사상들에도 관심을 갖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