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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May 07. 2023

부업을 하면서

- 남 탓

 의류 태그를 붙이는 부업을 했다. 옷 사이즈가 적힌 태그에 브랜드의 로고를 붙이는 일이다. 작업은 단순했다. 왼손에 태그를 짚어 들고 오른손으로는 로고에 딱풀을 발라서 둘을 연결하면, 15원이다. 묶음 당 1000개가 들어있는데 혼자 하면 5시간 정도 걸린다. 시급 3천 원! 뭔가 복잡한 심정이었다.


 작업을 엄마와 삼촌과 함께했던 날이었다. 2천 장을 끝내고 저녁시간이 되었을 때 엄마가 말했다. "일도 열심히 했으니까 맛있는 거나 시켜 먹을까?" 그렇게 족발이 도착했다. 족발 가격이 4만 원인데 우리는 2천 장(3만 원)을 하지 않았나? 순간 이게 맞나 싶으면서 입맛이 뚝 떨어졌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말이 습관인 엄마. 그런 엄마에게 "그러니까 못살지."라던 누군가가 떠올랐고, 돼지 발을 먹는 건지 내 발을 먹는 건지 모를 만큼 우울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우리 집은 왜 못 사는 걸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진로 선택을 신중하게 했더라면, 독서를 했더라면, 그때 그 친구를 멀리 했다면.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산다는 말이 있다. 자기혐오를 동반한 과거의 반추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불확실한 미래 역시 내 탓으로 여기며 마음껏 불안해했다. 이것을 부정하고 탈피하고 싶은 욕구가 아팠지만, 단순히 다른 측면에서 보고 싶은 호기심도 생겨났다.


 왜 15원이었을까? 심지어 처음에는 10원이었다. 내가 부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은 내 탓이 맞다. 하지만 그게 15원인 것은 누구의 탓일까? 우리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중간 업자다. 그 사람의 급여는 본사에서 나오는 걸까 우리에게서 나오는 걸까? 매출이 올라가면 16원이 될 수도 있을까? 30원이 되면 돈을 쉽게 버는 걸까? 급여를 올려달라는 노동자의 주장에 "능력만큼 버는 거다."라며 반박하는 목소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업자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태그를 붙여도 최저임금의 30%도 안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내가 안 해도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집단 가스라이팅에 당한 것처럼 말이다. "못 배우고 기술도 없는데 이거라도 받는 게 어디야."라는 희망찬 곡소리가 만연하다.


 뉴스에 이따금 유럽의 파업 관련 소식이 나온다. 그들은 휴가도 길고 임금도 높던데 왜? 물가가 높아서? 그렇게 노동자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 부도나면 너 죽고 나 죽고 아닌가?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수십 년간 확인한 바에 따르면, 임금상승이 부도로 직결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쉽게 말해 노동자도 기업이 비축해 둔 자원을 가늠할 수 있으니까 주기적으로 쫀다는 소리다. 반면 우리는 파업을 이기적 행태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의 노동생산성을 거론하며 한국의 비효율적인 '업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주입식 교육부터 수직적 조직문화를 거론하며 계몽을 외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는 왜곡이라고 봐도 좋다. 한국인이 정말 멍청해서일까? 유럽과 우리는 기업의 출발점과 내구성이 다르다. 내가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런 가정을 해봤다. 만약 산업혁명이 한국에서 시작됐다면 유럽이 현재의 아시아만큼 따라올 수 있었을까? 유럽의 높은 노동생산성이 개개인의 우월함이라는 사고방식은 역사적 패배주의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우리나라도 자동차를 100년 전부터 만들었다면 노동생산성이 꽤나 높다는 평을 받고 있을 것이다.


 경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 탓도 좋지만 남 탓도 해보자는 소리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를 예로 들어보자. 그러한 역사가 없었다면 흑인의 평균 임금이 지금보다 5% 이상 높았을 것이라는 추론에 반박하기는 힘들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나의 부업은 15원이 아닌 16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대 대통령 몇몇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17원이었을 지도. 나의 자아상에 상처를 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불안과 우울이 늦게 찾아왔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상치 못한, 통제할 수 없던 그 타이밍에 그 일이 없었다면 시급 따위 운운하며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IQ와 노력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잘못일까? 차분하게 생각하면 온전히 자신의 탓인 것은 많지 않다. 예수도 아니면서 남 탓까지 짊어지고 고통받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적당한 남 탓이야말로 이기심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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