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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May 19. 2023

내 남자는 어떤 게임을 하는가

- 안 하는 게 답인가

 내가 만난 한 여성은 나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했다. 게임을 하느라 그녀와의 전화통화에 집중하지 못했던 일, 친구와 PC방에서 날을 샜다는 이유로 다투었던 일, 게임에 돈을 많이 써서 잔소리를 들었던 일. 게임 중독일까? 그런데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내 남자친구는 게임을 너무너무 좋아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녀는 나에 대해 몰랐다. 대화가 없어서였다.


 게임은 용돈벌이이자 자존감 유지장치였다. 내가 했던 게임 속 세상은 모두가 흙수저로 시작했다. 시간을 투자하고 연구하면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었다. 나는 그곳이 평등하고 이상적인 곳이라고 여겼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약자를 도와주며 자존감을 챙겼다. 현실에서는 스스로를 루저라고 자책했음에도. 나는 마음의 병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만약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하려고 할 때 "게임을 좋아한다."라는 결론이 얼마나 큰 오해인가 하는 것이다.



:: MMORPG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의 약자라는데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WOW, 리니지, 로스트아크,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가 있다. 세부적인 장르는 다르지만 맥락은 같다. 내가 즐기는 장르다.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Role(역할)을 맡아서 임무를 수행한다. 몬스터를 때려잡는 역할, 동료를 치료하는 역할, 또는 작전을 지휘하는 포지션도 있다. 즉, 한 명이 빠지면 굴러가지 않는다. 작전 수행 시간은 접속자가 많은 주말이나 평일 밤 시간대이며 고정 멤버를 구축하거나 약속을 정해둔다. 게임 속 세상도 작은 '사회'다. 평판이 존재하고 인맥도 있다. 현실처럼 스펙, 성실함, 인성, 대인관계스킬도 필요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약속을 어기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고립된다. 현실과 다를 게 없다.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약'이나 다름없다. 세상은 알아갈수록 부조리와 불평등만 보인다. 나름의 해소 창구를 찾은 것뿐이다. 무작정 게임을 관두길 바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체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건전한 취미를 갖아보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는데,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취미를 찾는 것은 탈모약 발명만큼이나 어려워 보였다. 게임중독을 용인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과 대화를 해보자는 뜻이다. 게임 속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왜 게임에서만 치유를 찾았던 것인지, 그가 어떤 역할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알아가는 관심이 이해의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여자친구의 게임에 관한 인식이 바뀐 일화가 있다. 인터넷방송이 흥하기 시작할 무렵 여자친구에게 아프리카 TV를 추천했고 같이 보는 일이 많았다. 한 번은 25명이 모여서 보스 몬스터를 잡는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전멸과 재도전을 반복하며 오류를 수정하고 각자의 의견을 모으는, 마치 스포츠와 같았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와이프 때문에 가봐야겠네요."라면서 용서를 구했다. 나머지 24명은 땜빵을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다음 탈퇴한 사람은 "제가 피해만 주는 것 같아요. 더 잘하는 사람으로 바꿔주세요."라면서 떠났다. 어쨌든 클리어를 했고 사람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여기다. 정신건강 측면에서 이보다 높은 힐링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비용이 들거나 게임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과정을 지켜본 여자친구는 "명작 영화 한 편 보는 것보다 낫네."라며 좋아했고, 중간에 탈퇴한 사람들이 안쓰럽다고 덧붙였다. 나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친구의 게임중독을 응원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중독'속에서 무엇을 갈구하며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관심을 갖고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다. 여자친구는 이런 말도 해주었다. "너님이 저런 상황에 놓여있을 때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조금 양보해 줄게. 나는 너님이 저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도 싫고 저런 기쁨을 나 때문에 놓치는 것도 싫어." 그 후로 내가 게임에 집중하는 시간대가 언제인지, 나는 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다른 게임은 어떤 종류가 있고 왜 그 게임을 하는지 등 많은 대화를 나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남녀사이는 대화가 중요하다.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자친구에게서 또 하나의 힐링을 찾았고, 그 후로 건강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리니지류

 리니지라이크로 불리는 장르다. 시장은 PC에서 모바일로 넘어갔다. 대표적으로 프라시아전기, 나이트크로우, 오딘, 아키에이지워 등이 있다. MMORPG와 유사하지만 노력과 실력보다는 '현금'으로 힐링을 한다. 학창 시절 게임에 돈을 못쓰던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경제력이 갖춰진후 유입된 케이스가 많다. 때문에 연령층이 30대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빠르게 모바일로 이전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핸드폰은 바쁜 직장인이 짬짬이 하기에 안성맞춤일뿐더러 자동사냥까지 제공하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리니지라이크의 게임문화는 평이 안 좋은 편이다. 이 장르는 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 있다. PK(Player Kill)라고 불리는 시스템인데, 마음에 안 들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죽임을 당한 상대가 더 많은 결제를 한다면 '복수'도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현실 자금력으로 꾸며진 동물의 왕국인 셈이다. 오고 가는 채팅이 과격한 편이고 약육강식의 가치관이 주류다.


 남자친구가 여기에서 힐링을 찾고 있다면 관심 있게 봐야 한다. 게임 속 세상이지만 약자를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지배층이 되려면 많은 금액을 때려 넣어야 해서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한다. 월 50~100만 원 이상 투자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카푸어를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다. 자존감을 메우는 수단만 다를 뿐이다.


 앞선 설명은 '지배층' 다른 말로 과금러 또는 과몰입 이야기다.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이 더 많으며 그들은 '피지배층'이다. 앞서 언급한 MMORPG를 즐기는 유형과 다르지 않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돈만 있으면 군림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고, 그것은 때때로 온라인을 넘어서서 현실에도 반영된다. 이런 가치관을 파악하려면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지배층이 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리니지류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만약 그가 "내가 돈이 없기 때문에 저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정당한 거야."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참고로 피지배층이라고 하더라도 적은 돈을 쓰지는 않는다. 지배층이 너무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 때문에 지배당할 뿐이다. 이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눠본다면 그의 경제관념도 추측할 수 있다.



:: 핸드폰 게임(수집형)

 정확한 명칭은 없다. 수집형 RPG라고 부르기도 하며 리니지류와 다른 점은 PK와 현금 거래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싱글게임에 가까운 구조다. 각자의 템포로 자기만족을 실현하며 덜 자극적이다. 랭킹시스템이 있지만 MMORPG나 리니지류 게임에 비하면 동기부여가 적다. 여기가 포인트다. 그럼에도 엄청난 금액을 투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종의 수집욕인데 랭커들이 쓴 돈을 보면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남자친구가 이런 게임을 하는데 돈을 많이 쓴다면, 순수한 게임중독 또는 쇼핑중독일 확률이 높다.


 타 게임들에 비해서 커뮤니티 기능이 빈약하다. 이런 게임을 하면서 채팅을 쳐 본 기억이 많지 않다. MMORPG에 비하면 바람날 일이 적다. MMORPG는 동료 간 연대가 중요하고 장시간 접속하기 때문에 정분이 나기 좋다. 실제로 게임에서 연결된 커플이 많고, 나도 그중 하나다. 어쨌든 이런 게임에서 커플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으니 어떤 면에서 안심이라고 할 수 있다.



:: 비디오 게임(스팀)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닌텐도라는 게임기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스팀은 게임 기계가 없어도 PC로 구동하는 서비스라고 이해하면 쉽다. 보통 패키지 게임이라고 불리는데 음반처럼 첫 구매만 완료하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 대부분 엔딩이 있으며 온라인 연결은 큰 의미가 없다. 스팀에도 MMORPG는 있기 때문에 남자친구가 하는 게임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검색을 해보아야 한다. 게임 종류만 수천 개가 넘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패키지 게임이라는 가정하에, 싱글게임이므로 '일시 정지'가 가능하다. MMORPG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하는데, 이 동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디오 게임을 하는 남자친구가 전화통화에 불성실하다면 혼나야 한다는 의미다. 정지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전화보다 게임에 집중한다면 게임중독을 의심해 봐야 한다. 아니면 애정이 없거나.


 이곳이 내가 생각하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의 영역이다. 게임 외적인 요소가 적어서다. 동시에 오타쿠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피규어를 모으고 애니를 즐겨보는 사람은 리니지류 게임보다 이곳에 많다고 확신할 수 있다. 포장해서 말한다면 정신건강이 좋다. 게임에 한해서는 그렇다.



:: 단판 경쟁

 대표적으로 LOL,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스타크래프트가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제외하면 타 장르보다 연령대가 젊은 편이다. 1020과 3040은 게임에 대한 경험과 가치관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배경 역사가 깊으니 덮어주기로 하자. 연령을 언급한 이유는 대화를 이어나갈 단서이기 때문이다. 20살 남자친구가 리니지류 게임을 한다면, 40살 남자친구가 롤을 한다면, 그에게는 남다른 연결고리가 있을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를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채팅은 악명이 높다. 리니지류의 악성 채팅은 길고 감정적인 반면, 이곳은 짧은 악플 감성이다. 단판 경쟁 시스템은 교류가 별로 없다. MMORPG에서는 갈등을 겪었던 상대가 친구의 친구라던지 미래의 동료가 될 가능이 있다. 화해를 하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한다. 그런데 단판 경쟁은 교류가 전무하니 평소보다 강도가 쌘 말이 오고 간다. 남자친구가 이런 채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상상해 보자. "니x mother xx 죽었냐 없냐." 내가 보수적이라서 그런 걸까? 저 화살이 여자친구를 향할 일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게임을 하는 내내 저런 환경에 노출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정상인이 더 많다. 채팅을 끄거나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다수라는 이야기다.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이자 노력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이런 소재를 글로 써봐야겠다고 다짐한 계기는 일부 여성들의 '남친 테스트'였다. "우리 헤어져.", "나 임신했어."같은 거짓말을 해보고 그의 반응을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친구를 동원해서 바람기 테스트를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생각은 대화가 부족한 게 원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다면, 나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면, 대화를 해보자. 대화는 소재가 있어야 하고 게임은 유용한 연결이 되어줄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그가 했던 게임을 따라가 보는 게 리스크 가득한 테스트보다는 얻는 게 많을 것이다.


 내가 남자라서 이런 글을 썼을 뿐이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자친구가 베이킹에 심취했을 때, 인형수집과 재봉에 빠졌을 때 관심을 갖으려 노력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여초커뮤니티에서 발생했던 크고 작은 논란으로 이어졌고, 그에 관한 여자친구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없는 여자친구의 일상은 어떤 공간인지, 그녀에게 접촉하는 사람들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남녀 간의 대화에 교집합만 다룬다면 한계가 보인다. 진정한 관심은 내가 관심이 없는 것까지 공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맞을 때도 있다. 회의적인 시각으로 말하자면, 내가 봤던 게임 속 그들은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녀석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여자친구나 배우자가 있었다. 특이한 케이스도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인격을 철저히 분리하는 사람인데, 예를 들어 게임 속에서 악행을 일삼던 지인은 현실에서는 모범시민 모범가장이었다. 그는 "게임은 게임이니까."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연인의 서로에 대한 관심은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열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관심과 대화가 없다면 열어볼 기회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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