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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Oct 12. 2023

열등감과 나르시시즘

- 착하게 사느라 피곤한 사람들

 <착하게 사느라 피곤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심리 상담 서적이다. 책에서 다루는 핵심 키워드는 피플 플리저(people pleaser), '타인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심리학 용어라고 한다. 목차를 살펴보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1. 거절이 두려운 사람들

2.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들

3. 죽어도 부탁은 못 하는 사람들

4. 돕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

5. 타인의 기대대로 사는 사람들

6. 미소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

7. 절대 화내지 않는 사람들

8. 매일 반성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브런치에서 유독 많이 목격된다. 착한 자식이 되기 위해 부모의 기대를 걱정하는 사람, 착한 배우자가 되기 위해 이혼을 참는 사람, 착한 직원이 되기 위해 웃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 착한 시민이 되기 위해 독서를 하는 사람. 어쨌든 우리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책은 "조금은 나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을 지키자."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솔직히 고리타분한 이론이다. 이러한 책을 여러 권 읽어봤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그걸 몰라서 이렇게 사나." 하지만 책 한 권이 무채색인 경우는 드물다. 3장 '죽어도 부탁은 못 하는 사람들'의 키워드가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인데,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착한 사람이 되려는 부류에게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여서다. 하지만 읽어보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타인에게 부탁하지 못하는 심리가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의 충돌이라는 해석은 신선했다. 병가를 내야 할 정도로 아픈데 내가 없으면 타인의 업무량이 많아지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피플 플리저는 혼수상태가 아니라면 출근을 강행한다. "나 같은 말단 직원이 겨우 이 정도 고통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없어."라는 열등감과 "나는 이 정도 고통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나르시시즘의 충돌.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상황을 가정해 보자. 월급 도둑에 꼰대인 직장 상사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상사를 바라보는 내면도 두 가지 감정의 충돌이다. "내가 너 같은 놈한테 도움을 받는다고?"라는 나르시시즘과 "내가 얼마나 무능하길래 이런 놈에게도 부탁을 해야 하지."라는 열등감. 부탁을 하지 못해서 야기되는 업무 부담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고 좋지 않은 결과를 낸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실제로 열등한 상태에 놓일 확률이 상승한다.


내면에서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이 충돌했을 때, 당신은 오직 꿈속에서만 절대 고수다. 현실에서는 눈만 높고 실력은 형편없어서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꽂힌 부분은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직하면 손해다."라는 자본주의의 명언도 비슷한 결이 아닐까? 회사 비품을 내 것처럼 아껴 쓰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성실함을 지속하면 "나는 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 직장인이다."라는 나르시시즘이 형성된다. 회사 비품을 개인 용도로 빼돌리고 불성실하기까지 한 직원이 자신보다 높은 성과를 올리면 열등감을 느낀다. 나르시시즘과 열등감의 충돌로 협업을 꺼리게 되면 업무 부담은 늘고 성과는 낮아진다. 이를 반복하면 고립될 수 있는데, 이때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점은 반복된 고립으로 '실제 업무 능력'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도달하면 아무리 공명정대하게 보아도 내가 열등한 직원. 다시 말해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다.


"이런 xx한테 부탁하느니 내가 다 하고 말지." (나르시시즘)

"이런 xx한테 부탁해야 하는 내가 너무 싫다." (열등감)


 위와 같은 충돌을 동기부여이자 노력으로 믿어왔다. 사실은 나도 모르게 형성된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들과 타협하는 것이 정답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능력'이 없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능력이라 하면 모아둔 재산이나 실력 또는 인맥을 아우르는 말인데, '착하게 사느라 피곤한 사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능력은 줄고 고통이 늘어난 경우가 많았다.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많은 고민을 해왔지만 방법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착하게 사느라 피곤한 사람들에게 덜 착하게 살라는 말이 조언이 될 수 있을까? MBTI E가 I가 되고 F에게 T가 되라는 것처럼 어려운 주문이다. 애초에 착하다는 기준이 무엇일까? 이러한 종류의 의문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 착하게 사느라 피곤하지만 능력을 잃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다. 이조차도 불합리하다고 여긴다면 현대 사회에 태어난 불운을 탓하든지 혁명이라도 일어나야 한다. 끝으로 자신이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의 충돌을 겪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하단의 문장을 확인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칭찬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마냥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다가, 반대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하면 엄청난 굴욕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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