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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Oct 13. 2023

문득 새삼 대단 and 손흥민

- 국뽕 밈 드립

 축구 영상 댓글을 보다가 이상한 문장을 봤다. "문득 새삼 대단 금지." 해당 댓글은 압도적인 '좋아요'와 함께 최상단에 노출되어 있었다. 대댓글은 작성자의 센스를 칭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가 모르는 밈이나 유행어인가 싶었는데, 그것의 정체는 항상 매일 반드시 목격됐던 그것이었다.

문득 새삼 대단 밈


드립

 첫 댓글 작성자는 '드립'이었을 것이다. 문득과 새삼은 한 문장 안에서 같이 쓰기 어려운 어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성자는 손흥민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손뽕'이라 불리는 부류를 비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굳이 마이너 한 드립을 이해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하루에 유튜브를 38시간 보는 나의 감각은 그것이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부상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메이저 드립과 밈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터넷 문맹이 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영상 문해력'의 저하를 초래한다.


 드립임을 알았다면 첫 번째 대댓글처럼 '굳이 안 적어도~'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따지고 보면 같은 편이니 말이다. 해당 대댓글이 없었다면 '너는 인생이 얼마나~'라는 갈등도 없었을 것이고, '근데 기습숭배 거르고~'라는 대댓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드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자. '손뽕'이라면 작성자를 훌륭한 애국자이자 동료라고 생각할 것이고, '손까'라면 국뽕 채널에 중독된 한심한 아저씨로 여길 것이다. 이는 은유법이나 반어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학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드립을 이해하는 것은 신조어와 유행어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어휘력이 반드시 문해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드립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단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풍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작성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던가 쓸모없는 감정소비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드립을 모르다면 단체로 동문서답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최소한 그곳에서만큼은 자신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단점이 이어진다. "그거 드립이에요 아재요.", "드립인데 혼자 풀발 ㅋㅋ"같은 취급을 받기 쉽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드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조리돌림하는 현상은 '마이너 드립'에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들만이 공유하는 드립으로 외부인을 걸러낸다. 일종의 텃새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메이저 드립'일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재석이 메뚜기랑 무슨 상관인가요?", "강호동이가 뭘 그렇게 많이 알아서 '아는 형님'이라고 그러는 거죠?"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쉬운 비유를 위해서 올드한 사례를 가져왔지만 현실에서는 트렌디한 드립과 올드한 드립의 경계가 애매하다. 이 글의 주제인 '문득 새삼 대단' 역시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다. 판단은 각자가 하겠지만 축구에 관심이 많다면 알아두면 좋은 드립이라고 생각한다.



손까 vs 손뽕

 손까는 "무조건 손흥민을 깐다."라는 의미다. 손뽕은 '국뽕'의 변형으로써 손흥민이라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세력을 말한다. 국뽕은 "대한민국은 무조건 위대해~!"라는 (구) 신조어로 명백한 메이저 어휘다. 국뽕이 뭔지 모른다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한다. 어쨌든 손까와 손뽕의 대립을 이해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다. 개념만 다를 뿐 친일과 반일, 진보와 보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대립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는 소수도 결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손까는 국민적 영웅인 손흥민을 비난하는 매국 세력임과 동시에 손흥민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날조 정보 유포를 견제하는 애국 세력이기도 하다. 손뽕은 비이성적인 자화자찬으로 국격을 갉아먹는 매국 세력이자 자국 선수를 응원하는 애국 세력이다.


 다툼이 없을 수가 없는 구조다. 손흥민을 순수하게 응원하는 사람이 손뽕으로 내몰리고 냉철하게 낮은 평점을 내놓은 사람은 손까가 된다. 유사한 갈등은 우리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돼."라는 발언이 친일일까? "일본은 잃어버린 50년을 경험하게 될 거야."는 반일일까? 이 둘은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해석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반일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는 부분에서 발끈할 것이고, 친일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일본이 50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경고성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확증편향 실험에서 IQ를 적용한 사례가 있었다. 실험에 따르면 IQ가 아무리 높아도 확증편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고학력자일수록 자신이 옳다는 증거를 더 많이 제시할 뿐이었다. 따라서 확증편향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떠올리지 않은 의견'을 경청하는 수밖에 없다. 손까도 없고 손뽕도 없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툼의 여파는 줄여나갈 수 있다. 이런 발언은 현실주의자들에게 이상주의자의 푸념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줄여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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