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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Oct 24. 2023

정직한 수험생의 멸망

- 정도를 걷자?

공시생

- 정독보다 다회독이 효과적이다.

- 기본서 좀 그만 보아라.

- 기출 분석이 우선이다.

- 지엽적인 내용에 얽매이면 답이 없다.

- 천재가 아닌 이상 뒤로 가면 앞부분은 다 까먹는다.

- 인강은 강사가 공부한 것이지 당신의 공부가 아니다. (인강 좀 그만 보세요.)


 좋은 조언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만하고 게으른 부류가 아니다. 기초부터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공부의 정도(正道)라 믿는, 그것이 곧 '정직'이어서 마이 웨이를 걷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배움에 있어서 만큼은 선비 정신을 계승한다. 마음속이 정직으로 가득하다. 하루 3시간만 자면서 기본서만 탐독하는 이를 어떻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정직에 매몰된 축구선수는 할리우드액션으로 반칙을 유도하지 못하며 아군의 위기를 반칙으로 끊어낼 수 없다. 바둑과 체스에서 상대를 기만하고 속이는 전략도 불가능하다. 전공시험의 유일한 기출문제집인 족보를 손에 넣는 데에 무관심하다. 일부 예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철학과 이념 갈등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진보와 보수, 가치와 실리 따위 논쟁의 시초는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동양이 서양에 굴복했던 역사도 비슷한 결이었다. 역사는 정도를 숭고하고 정의롭게 묘사하지만 실질적인 승률은 굉장히 낮았다. 소수만이 승리했기 때문에 회자되고 존경받는 것이다. 기본서 위주로 공부해서 합격한 공시생은 '소수'다. 내가 볼 때는 단순한 지능 차이로 보이기도 한다. 정도를 걸었던 합격자가 현실적인 조언을 수렴했다면 수석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정도를 추구하는 부류여서 불편한 마음이 있다. 스무 살의 나에게 이런 소리를 하면 씨알도 안 먹힐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반복된 실패 경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학

 대학교를 중퇴했을 때 독학을 결심했었다. 유명 대학의 커리큘럼을 조사해서 같은 교재를 구입했다. 1학년 교재부터 정복해 나가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현실은 너. 무. 나 어려웠다. '~개론', '~의 이해'로 끝나는 교재들은 냄비와 모니터의 받침대가 되었다. 한 번은 실습에 도전했다. 전자기판을 이용하여 임베디드라는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는데, 정도를 걸으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인두, 작업대, 전선, 코딱지만 한 전자부품 구매에 50만 원을 투자했다. 나는 진심이었다. 신에게 정직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밤낮없이 몰두했다. 하지만 완성품은 작동하지 않았다. 조언을 구할 대상도 없었지만 어떤 조언을 구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역량을 초과하는 욕심이었다. 임베디드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경계에 있는 기술이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던 나는 전기전자 지식이 전무했다. 회로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반복하는 작업은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꽤 정직한 발상이지 않은가? 정도를 걷겠다면 최소한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공학계열에서 컴퓨터를 선택한 이들은 공대생 중 수학에 약한 편이었다. 나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게임이나 웹이 인기여서 실제로 수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경우가 적었다. 그런데 회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이 필수였다. 고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시작했다. 밑바닥부터 올라갈 자신이 있었다. 정도를 걷는다는 확신은 자존감도 올려주었다.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한 후였다. 내가 하려던 것은 현업 종사자 또는 대학원생 수준이었다. 전기의 원리부터 프로그래밍까지 아우르는 공부는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 즉, 현실성이 없었다.


 <1인 개발자! 독학으로 성공! 인터넷으로 배운 기술로 대기업 취업!> 이런 문구가 눈에 띄는 이유는 '소수'여서다. 다수는 뉴스가 되지 않는다. 회의론자가 되자는 소리가 아니다.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는 조언은 독이 될 수 있다. 나는 프로그래밍 공부를 충분히 해둔 후에 회로 공부를 했어야 했다.



자격증

 전기기사를 공부할 때 들었던 강사의 조언이 잊히지 않는다. "여러분! 하나하나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정도를 추구하는 나에게는 사도(邪道)와 같은 말이었다. 지금은 내가 틀렸음을 안다. 첫 번째 필기에서 떨어진 이유가 모든 것을 알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잡한 공식 문제가 한 개 정도 나오는데 미분방정식을 알아야 한다. 물론 몰라도 맞을 수 있다. 반복되는 문제는 답을 외우면 되는데 빌어먹을 정도병이 문제였다. 자격증을 꼭 따야 해서 성실하자는 각오였을 뿐인데!


 우리나라 자격증 시험은 기출 의존도가 높다. 한때 정보처리기사는 문제와 답만 외우고 하루 만에 합격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보처리가 아무리 날로 먹는 자격증이라도 학점과 경력을 요구하는 시험인데 너무했다. 그것은 정의롭지 않았다. 나는 정보처리기사도 꽤 열심히 공부해서 실기는 1개만 틀렸다. 하지만 실기를 1개만 틀렸던 노력은 어디에도 사용되지 못했다. 자격증에 점수가 적혀있는 게 아니라서 60점과 100점은 같은 효력을 지녔다.


 자격증은 합격만이 최우선이다. 자격증과 공부를 분리하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말이 쉽지 정도를 추구하는 부류에게는 어려운 발상이다. "일단 외워!"라는 교육방식에 저항했던 학창 시절 가치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꿔야 한다. 국내 자격증이 요구하는 지식은 이론에 치중해서 실용성이 떨어질뿐더러 의도적으로 지엽적인 문제를 만든다. 열심히 해봐야 쓸모없는 공부가 대다수라는 의미다. "그래도 지식인데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라며 반박했던 과거의 나를 저주한다.



취미와 자기 계발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할 때다. java를 수료하고 visual c++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도병에 걸린 나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는데, 그런 나에게 선배가 한 마디 했다. "야, 프로그래밍은 어차피 비슷한 거야. java 해봤으니까 실습으로 적응해야지. 언제 또 하나부터 다 하고 있냐?" 그 말을 듣고는 너무나 화가 났다. 대충대충 하라는 말처럼 느껴져서다. 선배가 나를 질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선배의 조언이 옳았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즈음에는 돌이킬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조언이었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문법만 달라질 뿐 개념은 공통이다. "Hello world."가 뜨는 원리까지 '다시'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정도를 추구하는 부류는 엑셀과 워드를 학습할 때에도 그렇다. 실무에서 사용하는 기능은 많지 않다. 조작법만 익힌 후 필요한 기능만 학습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아무리 현란한 기능을 익혀도 쓰지 않으면 금방 잊는다. 하지만 정도를 걷는 자는 용납하지 못한다. 책을 사고 온라인 수강을 열람하며 1장부터 빠짐없이 학습한다. 운전도 그렇다. '클러치'의 작동원리 이해가 1종 보통의 의무라고 여긴다. 온라인 게임을 할 때는 어떠한가. 바로 전투에 가담하기보다는 차근차근 성장하며 정보를 수집한다. 그래도 게임은 낫다. 인간이 창조한 세계는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끔씩은 정도가 유리했다.



가치관과 심리

 내가 만약 독학을 10년 동안 지속했다면?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가치관의 충돌을 겪는다. 노력이란 상대적인 동시에 절대적이고, 그 사이 어딘가가 자신의 한계이자 재능의 밑바닥이다. 그것을 수용하는 자세가 패배인지 현실인지 정답을 모르겠다. 얼마나 뛰어야 할지 모르는 마라톤 중 50Km에서 포기한 사람은 패배자일까? 60Km를 뛰었지만 방향이 틀린 사람을 멍청하다 비난할 수 있을까? 평생 동안 정도를 걷고도 실패한 케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깝다. 어차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자명한데, 언젠가는 타협하지 않으면 부러져버릴 것 같은 불안이 있다.


 정도를 고집하는 사람은 '나르시시즘'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저따위 편법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나르시시즘일 수 있다. 완벽주의도 영향을 끼친다. 정직하게 공부하지 않았다는 죄의식이 불안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을 보유한 사람으로서 감히 조언을 해보겠다. 자신이 '정도병'에 걸렸다면 계획된 목표보다 더 높은 곳을 노려야만 인생이 암흑으로 덮이지 않을 것이다. 힘이 없으면 정도를 고수할 기회조차 없다.


 회의적인 글이 된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부류는 '정도를 고집해서 실패하는 유형'이다. 성공한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결말은 없을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성공미담만 회자되어 희망고문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성공담 도취도 일종의 중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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