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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Jun 10. 2024

식민사관에 빠져보았다.

- 윤치호 일기

식민사관

 식민사관의 핵심은 자생능력이 없는 조선을 일본이 보호하고 계몽시켰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보호는 일본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것이고, 계몽은 조선의 열등함을 지적한다. 우월함에 끌리는 부류는 상대의 권위, 재산, 능력 등을 우선시하는 기질을 갖는다. 열등함을 인정하는 부류는 자기반성, 비판의식, 팩트 등에 주목한다. 전자보다 후자가 진심일 수밖에 없다.


 부자를 동경하는 사람보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더 진심인 것처럼, 조선이 열등하다는 시각에서 완성된 친일은 성벽처럼 견고하다. "조선은 일본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맹목적인 친일파와 다르다. 일본을 '미국'으로 치환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의식 수준이 낮았던 과거에는 우월함을 앞세우는 전략이 유효했으나 요즘 시점에 그것은 낯부끄러운 주장이다. 최근의 식민사관은 조선의 열등함을 강조한다. 메신저가 한국인이면 설득력을 더한다고 판단했을까?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는 자료에는 윤치호의 어록이 많다. 윤치호는 독립유공자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동시에 오른 인물이다.


대동아공영권 프로파간다(좌), 윤치호(우)



윤치호 일기

독립협회 회원들은 여전히 동요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일반 대중의 가공할 만한 무관심이다. (중략) 이런 국민한테 희망을 갖다니, 우리가 더 바보였다. 왕이나 국민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노예상태 뿐이다! - <윤치호 일기>


- 당해도 싸다는 인식을 강화시킨다. 쇄국정책을 비판하는 여론도 같은 결이다. "~을 했더라면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텐데" 조선은 망하는 게 당연한 나라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식민사관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유교의 교훈은 꽤 아름답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 사회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도덕에 신이 존재하지 않고, 그 정치 체제가 민중을 외면하는 유교는 어느 민족이든지 자만스럽고 이기적이며 노예근성에 빠지게 할 만큼 충분히 야비하다. 유교의 남존여비, 왕명에의 절대복종 강요, 그리고 그 영원한 복고주의는 유교 부패의 씨앗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 식민사관은 정신적인 부분도 강조한다. <윤치호 일기>가 식민사관을 주장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부류가 줄기차게 인용하고 있다. 유교의 장점이 알려지기 어려운 형국이다. 대다수의 한국인이 유교를 좋아하지 않게 된 배경에는 식민사관의 지분이 상당하다.


윤치호 일기 영어 원문(좌), 윤치호 일기(우)


조선인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그런 성명서를 발표하면 시위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역효과를 낼 것이다.


- 조리돌림, 왕따, 냄비근성, 마녀사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것들 모두가 조선인 특유의 기질일까? 그렇다고 믿는 부류는 식민사관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조선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문장이다. 정치로 보자면 보수가 진보를 비판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젠더갈등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며 최근에는 푸바오 논란이 있었다. 무분별한 반중 반일 선동을 비판하는 곳에서도 곧잘 보이는 문구다.


조선인들은 머리가 비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 작년에 화제가 된 뉴스 중 하나가 '한국의 명품 소비율 세계 1위'였다. 한국인이라면 허영심에 관해서 할 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천민자본주의와 졸부의 유명세를 보면 헛소리는 아닌듯하다.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


- 최근 논란 중인 밀양 사건 댓글에는 지역감정이 적지 않다. "전라도는 신안, 경상도는 밀양"이라며 서로를 물고 할퀴며 난리도 아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중 어디가 더 쓰레기?" 혐오를 조장하는 질문에도 진지하게 토론을 이어 나간다. 참고로 윤치호가 언급한 지역감정은 서북지방을 의미했을 확률이 높다. 경상도 전라도의 지역감정은 60~70년대 동서로 갈린 정치편향이 본격적이었다.


- 한국사총설DB에서 윤치호 일기를 읽을 수 있다. 일부는 한자가 많아서 읽기가 어렵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sa_024r




식민사관에 빠지는 원리

 <윤치호 일기>를 읽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합리적인 비판이며 거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크게 동의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인의 비리 뉴스를 보면서, 부당한 마녀사냥을 보면서,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보며 "이게 나라냐!"라며 분개했다. xx 같은 뉴스만 나오던 TV를 보며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도 있다. "야, 차라리 미국에 편입되는 게 낫지 않냐?" 나는 국가를 미국으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미국을 일본으로 바꾸면 친일파와 다르지 않다.


 최근까지도 심경에 큰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한국인의 부끄러운 행태를 보며 '소중국'이라는 단어에 공감한다. 자매품 '한궈'도 매력적이다. 자조적인 자국혐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고양시켰다. 한심한 댓글들을 읽으며 우월감도 느꼈다. 그러고 나서 일본을 바라보니 우리나라보다 모든 면이 좋아 보였다. 나는 친일파가 되었을까? 참으로 미묘한 흐름이었다.



식민사관을 벗어나자

 아무리 미련하고 어리숙한 학생이 있더라도 학교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그 학생은 괴롭힘을 당할 확률이 높다. 국제정세 또한 약육강식을 따르므로 일본의 지배는 순리였을 수 있다.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식민사관의 목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것에 있다. 이 차이를 확실하게 구별해야 한다. 식민사관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 투성이다.


 식민사관은 조선인이 태생적으로 지능이 낮다며 비난한다. 이는 흔하디 흔한 인종차별 클리셰다. 백인은 흑인의 지능을 폄하하려고 IQ테스트를 만들었다. 백인과 흑인의 교육 수준이 달랐음에도 테스트를 강행하여 백인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했다.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조선은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유전적으로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차이는 6% 내외로 알려져 있다. 조선인이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면 일본인도 거기서 거기라는 소리다.


 조선인은 도둑과 사기꾼이 많다는 주장도 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조선은 도둑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소매치기는 유럽이 더 많다. 명예백인을 주장하는 일본인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사기도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일본의 사법기관은 개인의 고소 고발을 쉽게 접수하지 않으며 소송보다는 합의와 조율을 따르는 관례가 있다. 사기범죄의 집계방식도 다르다. 밑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이 비정상적으로 낮게 집계된 것이다.


인구 10만명당 사기범죄 발생건수


 사건의 알고리즘 편향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어린아이의 웃음보다 불구경을 좋아하도록 설계되었다. 알고리즘은 감정이 없다. 사람이 오랫동안 머무른 영상을 더 자주 노출시킬 뿐이다. 과거에는 국가와 언론이 흑백의 비율을 조율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때문에 사건 사고가 더 부각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갑자기 일본의 사건사고를 전파할 이유도 없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우월함에 매료되어 충성심이 발현된 친일파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한국이 싫어서 일본을 택한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자국을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많이 알고 있어서다. 일본인 지인도 일본은 글러먹었다고 불평한다. 미국인이 미국을 비판하는 글도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식민사관 비슷한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합리적이지 않은 추론이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은 일본이 '창조'한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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