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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 베드로 Dec 11. 2020

그대들 있었음에

Part 4 하느님과 나와 세상과

 1. 신앙 신앙 신앙  

   

이제 매일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느낌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제 틀리고, 오늘 또 다르다.”란 말이 그렇게 과하지 않음을 나는 요즈음 실감하고 있다. 양지쪽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멀지 않은 미래의 , 바로 나 자신의 모습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떨어져 굴러가는 나뭇잎 하나에도 시선이 멈춰지며, 내년의 약속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감해 짐은, 어쩔 수 없는 노년 시기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스산한 바람과 함께 저만큼 석양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베란다 구석에 남아있던 작은 햇빛 조각에 조차도 아쉬움이 묻어나고, 서천의 석양도 붙들어놓고 싶은 마음이 전보다 더 간절해진다. 지나온 세월의 아쉬움도 그 무게만큼 무거웠는데, 채 걷어내지 못한 마음의 부채까지도 가끔 나를 짓누르기도 한다.


그 늪에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 허둥거리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며, 오히려 마음만 더 조급해진다. 왜 진작 몰랐든가를 반복하며, 통한의 후회를 해 본들, 해는 이미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고, 이제 곧 어둠이 다가설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저 멀리 사라져 가버린 과거의 그 모두가 헛 세월인 것만은 아니었으니, 너무 비감해할 것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엷은 미소로나마 나는, 나에게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진정한 위로를 하고, 또 받고 싶었다.     


1986년 여름. 그해 더위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현장에서의 중압감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었고, 몇 년간의 긴 해외 생활은 지쳐있는 나에게 휴식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특히 ‘리비아’에서의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의 여러 가지의 스트레스는, 중동 생활에 비할 바가 못 될 만큼 나의 피로도를 증강시키기에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사직서를 던지고 돌아 나서는 순간, 그 해방감과 함께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안 되는 바는 아니었으나, 지난 10년간의 직장생활은 내 자존감을 키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팽배하게 해 주어, 일단은 좀 쉬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함은 언제나, 그리고 항상 좋을 수밖에 없었다. 직장의 무거운 짐은 내려놓았으나, 가장으로서 어깨에 느끼는 그 무게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종교생활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동안 저지른 숱한 피폐의 삶들을 정리하고 싶었고, 아내나 아이들에게 가장으로서의 도덕적인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제일 우선임을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1983년도에 M.E(marriage encounter)라는 교육을 이수한 바 있었다. 이 모임은 1958년 스페인 ‘가브리엘’ 신부와 몇몇 부부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스페인 언어로는 ‘matrimonio encuentro’라 하며, ‘부부 일치 모임’이라고 불렀다.


청소년들을 지도하시던 신부님께서는, 청소년들의 문제의 근본 원인이 그 가정에 있음을 간파하시고, 문제 청소년들 부모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 모임을 운영함으로써 많은 효과를 보게 되었다 한다. 따라서 이것을 전 세계에 보급하게 되고, 모임의 초대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초빙되곤 했었는데, 나는 내가 감사실에 근무할 당시, 팀장이셨든 ‘지 재환’ 부장에 의해서였다.


그분은 이미 이 교육을 이수하셨고, 이제는 운영에까지 관여하고 있는 핵심 멤버이셨는데, 결혼연령이 10년 이상 되는 부부가 초빙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좀 일찍 초빙을 받은 편이었다. 주로 ‘천주교’를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그 초청 범위는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개신교 또 불교계에서도 호응이 좋아, 목사님과 스님들도 많이 참여하곤 하셨다.


지금도 여전히 이 모임은 계속되고 있고, 교육 이수 후에도 부부들과의 만남을 지속함으로써, 사회나 교회 각 분야에서 봉사활동 등을 통해, 여타 부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무르익었고, 황금 같았던 지난 세월을 탕진하고 낭비했던 나는 비로소 자리를 잡고 영육을 추스르고 있었다.


M.E 활동을 시작으로, 영혼 세척을 위한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고, 화려한 날개를 뽐내며 꿀을 찾아 이 꽃 저 꽃을 기웃거리던 나비 같았던 나를, 다시금 돌아보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성가대 활동도 다시 시작하였고, 영혼을 살찌우고 투명하게 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의 결과는 서서히 가시적인 모습으로 우리 가정에 스며들고 있었고,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신앙의 심연으로 차츰 잦아들며, 그 맛을 깊이 음미하게 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다 보면,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좀 자세히 들여다볼 수가 있다. 그 어렵고 고단한 삶들을 이어오면서도, 서로 비비고 보듬으며 풋풋한 정들을, 신선한 가을 새벽 공기처럼 뿜어내든 사람들의 이 이야기는, 소설을 뛰어넘어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작가는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묵시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시 공간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내재된 심리적인 상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변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아가는 우리들은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면서 그렇게들 지내고 있다. 헤어지기가 싫은 사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은근히 끌리는 사람, 가끔가끔 생각이 나는 사람, 영 잊히지 않는 사람, 참 별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너나 할 것 없이 거기서 거기인지라, 이러한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구별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른 얄팍한 심사야 그렇다 손 치더라도,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계도 없는 제삼자가 공연히 밉살맞을 때도 있다. 살아오면서 정신적인 멘토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평소에 생각해 왔다. 그것도 인생 여정 고비고비 때나, 변곡점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맺어진 그때의 인연은, 당시 겪은 상흔의 아픔보다 아름다운 감격으로 남아, 잊지 못할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번 주위를 둘러보자! 평생의 멘 토는 되지 못하겠지만, 싫지 않는 이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실팍한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토지』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제일 순위는 단연 ‘곰보 윤보’다. 내가 부족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그는, 비록 책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긴 하나, 내가 반할 정도로 시크한 인물이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페미니스트이고 로멘티스트이지만 우유부단한 ‘용이’ 보다는, 정의감과 함께 이웃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윤보가 더 필요한지 모른다.


책 속의 그를 닮는 것도 좋지만 우리 주변의 윤보를 찾아 멘토로 삼아 본다면, 그 또한 우리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    

 

이때쯤 홀연히 날아든 비보에 나는 또 흔들리게 되고, 하느님과의 갈등을 야기시킨다. 대구에서 걸려온 1통의 전화에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동생 ‘철’이의 사망 소식이었다. 전역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던 ‘철’이의 소식은 우리 집안을 온통 흔들면서 들쑤셔 놓고 있었다. 어머니는 쓰러지셨고, 아버지 또한 망연자실에 정신이 혼미하셨으며, 이 사태 수습을 위해서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전에 있는 ‘국군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마주한 ‘철’이의 주검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하느님에게 묻고 있었다. “피지도 못한 저놈을 왜 데려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라고, 외상은 보이지 않았고 왼쪽 다리가 부러져 있었으며, 병원 측의 설명대로라면 높은 굴뚝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왜 굴뚝에 올라갔는지? 또 올라간 ‘철’ 이를 병원 측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에 대한 것 외, 여러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었으나, 모든 것을 죽은 본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고, 그러한 병원 측의 해명에 나는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같은 민주화된 조직이 있을 리가 없었고, 군에서 제공하는 정보 외에는 그 아무것도 우리는 알 수 없었다. 9년 전 내가 직접 경험한 ‘지 상병’의 사건이 연상되면서, 이 시대의 부조리함을 탓하며, 돌아서야만 했든 것이 전부였다.


 철’이는 순직으로 처리되어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채 피워보지도 못한 그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매년 기일과 현충일엔 그를 찾아보고는 있지만, 내가 앞으로 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몇 년이나 더 다닐 수 있을지, 그것도 걱정이다. 도리 없이 나라에서 돌봐줘야 하지 않나 싶다.   

   

얼마 전 우연히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벽에 붙어있던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정부 수립이 후에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저들의 업무를 설명하며, 과거사건에 대해서도 조사가 가능하니 필요하신 분들은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다.


언 듯 ‘지 상병’ 생각에 연락처를 확인한 후 그곳으로 연락을 취해본 결과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이름만 거창하게 해 놓고, 무엇이든 해결해 줄 것 같았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민들 세금만 낭비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도 아직까지 청산해야 할 것이 많은 현 정부가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평화의 안식을 누리기를 이 기회를 통해 빌어본다. 아울러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용서도 동시에 빌고 싶다.

    

나는 신앙에 충실하면서 내실 다지기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슬슬 내 곁으로 다가서며, 차가운 냉기를 품어내기 시작했다. 아내의 눈빛도 점점 달라지며 때로는 애원으로, 때로는 호소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눈빛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가장으로서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현실은 내 코앞에까지 다가서 있었고, 그 현실은 내가 타개하고 나가야 할 내일이었다.


때마침 나에게 접근해 오는 한 인물이 있었으니, ‘리비아’에서 함께 근무했던 ‘서 중원’ 씨였다. 그는 나에게 동업을 제의했고, 나는 곧 심사숙고에 들어간다. 그가 제의한 업종은 전자기기였고, 사업이라고는 전혀 문외한인 내가 과연 할 수 있을지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또 내입장에서는 무엇이라도 빨리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수락을 하게 되고, 집을 은행에 저당, 대출한 자금을 투자하게 된다.


당시 거금‘오천만 원’을 투자한 후, 나는 설립한 회사 ‘선진산업’의 부장이 되어 그 일에 올인하게 된다.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내가 그녀의 고민을 불식시키기란 어려웠으며, 나 자신도 이 사업 자체를 확신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의 걱정과 나의 불확실성은 곧바로 현실이 되어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고야 말았고, 유동성 자금의 부족은, 계속 부채의 늪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었다. 자신만만하던 그마저도 자신감을 잃으면서 회사는 불황에 허우적거렸고, 급기야 생활비마저 제대로 충당할 수 없었던 우리들은,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불과 일 년 육 개월 만에 나는 빈 털털이가 되어 회사를 접게 되고, 안개 낀 황량한 벌판을 허둥거리며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되고 만다. 아내의 두 눈과 아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보기조차 힘들었던 나는 그 돌파구를 찾기에 혼신의 노력을 해 보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녹지 않았다.   

   

참 신기했다. 이 어렵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나는 송곳 같은 한 줄기의 빛이, 항상 내 곁에 머물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나에게 희망이었고 구원이었으며, 오아시스였다. 실망스러운 현실에서 주는 조그마한 재물의 기쁨이 아닌 그 빛은, 나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생명의 빛이었으며 희망을 꿈꾸게 하는 ‘뷰티풀 드림’ 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 필연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신념 때문임을 알게 된다. 고난이나 시련 중에도 그분의 사랑은 항상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 자체를 더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주어진 우리의 제반 여건이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그분의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만 있다면, 현실이 주는 그 어떤 두려움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념의 바탕 위에 나는 이 기간이 내가, 또 우리 가족들이 신앙적으로 한 단계 더 승화될 수 있는 기회임을 자각하고 교회에서나, 그 어떤 곳이라도 나의 신앙을 더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성가대에서의 역할도 확대시켜 나가며, 큰 행사 시에는 능동적인 참여로 모든 일에 앞장서 나가는 등 열정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비록 전보다 풍요로운 생활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더 평화롭고 푸근한 마음으로 이 기간을 슬기롭게 잘 보내고 있었다.    

 

‘㈜ 한양’에 같이 근무했던 또 한 사람인 ‘이 창길’씨에게 연락이 온 것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이때쯤이었다. 그는 충청도 청주사람이었으며, 대인관계가 월등히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싱글벙글 이었고, 한 마디로 ‘무골호인’이었다. 누구나를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로 그와의 근무는 항상 웃음과 즐거움이 상존하는 분위기를 연출할 정도였다.


그는 나에게 중장비 사업을 제의해 왔고, 전과 마찬가지로 별 뾰족한 생활의 방도를 찾지 못한 나는 그의 인간됨을 좋게 보고, 그 제의를 수락하게 된다. 물론 아내의 기우가 상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이미 중장비는 내가 경험한 최상의 아이템이었으므로 주저 없이 이를 무마시키면서 청주로 내려가게 된다.


작은 규모의 ‘bulldozer’인 삼성중공업에서 만들어낸 Sp-4 모델을 구입하고 이를 ‘농지개량사업’ 현장에 투입하게 된다. 기사 1명을 고용하고 나는 또 이 사업에 올인하게 된다. 사업은 순조롭게 일단은 출발했다.


그 어떤 사업이나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의 돌발변수는 있기 마련임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고향 청주에서 시작한 사업인 만큼 그의 자신감은 대단했으며, 또 주위에서의 도움도 상당해서, 나도 오랜만의 느긋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충북 음성에서 시작된 ‘개량사업’은 충청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제법 많은 현장을 창출하며 조금씩 확대의 길로 접어들었고, 나는 서울과 청주를 오가며 차츰 이 사업에 고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 시련과 시험  

   

성경은 ‘창세기(genesis)’ 로부터 시작된다. 어두움으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의 세상 창조사업은 마지막 인간 창조로 그 절정에 이르고, 이후부터 이어지는 모든 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를 다루고 있다. 자신과 꼭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살게 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위임하시며, 복까지 빌어 주신다. 그리고 참 흡족해하셨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조 격인 인간 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금기사항을 저 버린 그들은, 그분의 노여움을 잠재우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점점 더 죄의 덤불 속으로 빠지고 만다. 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추궁을 받은 남자가 그 책임을 하느님과 여자에게 떠넘기지 않았더라면, 또한 뱀으로부터 유혹을 받은 여자가 그 책임을 뱀에게 떠넘기지 않았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남자의 모자람은 그 책임을 하느님께 떠넘겼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변명은 또 다른 변명을 낳기 마련이다. 최초로 범한 인간의 거짓말과 변명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네 탓이요’ 만을 반복되고, ‘내 탓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카인에게 전수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아벨에 대한 질투를 야기시키며, 결국 카인의 범죄로 이어지고 만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약한 인간은, 질투의 유혹조차 이기지 못하고 범죄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멍에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지금까지 ‘원죄’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죄’는 지금도 쉬지 않고, 계속 저질러지고 있음을 우리는 자각해야 할 것이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잘못을,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렸을까를 생각하면, 실로 끔찍할 것임은 뻔한 일이다. 내가 약하고, 나의 불찰이 강만큼 넓고 차고 넘칠 진데, 그것을 깨닫지 못함도 전부 내 탓인 것을, 그래도 늦게나마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과 마주한다. 그것은 우리 주변 요소요소에 자리하면서 수시로 우리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쟝 폴 샤르뜨르’는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신은 우리에게 무한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였으며, 그 책임 또한 우리가 지라 하신다. 내가 선택한 내 인생 여정이 잘못됐다 한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대로 잘 이어지던 ‘농지개량사업’ 이 주춤 되기 시작된 때는 ‘88 올림픽’으로 떠들썩하던 10월 초순경부터였다. 그동안 우리 사업을 밀어주고 있던, 충북도청의 모 인사가 독직 사건에 연루되어 그 직을 사임하게 되고서부터이다.


그동안 누적되어 왔던 가계적자가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을 무렵에 터져 나온 이 돌발 변수는, 우리 모두를 또 다른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곧 어떤 대책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버티기를 몇 개월. 해가 바뀌고 봄은 왔는데, 우리는 그 겨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헛김만 내 쉬고 있을 뿐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적자의 폭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기사의 봉급조차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드디어는 우리의 생활비까지 압박을 받는 급박한 사정에 처해지게 된다. 도무지 죄여 오는 숨통을 틔어줄 그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나는 절실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매달리며 기도했다. 이 난관을 차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한편, 내 신심을 시험하시고 계시는 그분의 시선을 의식한 듯, 성경공부에 더욱더 매진하게 된다.


성경공부는 어느덧 ‘창세기’를 끝내고, ‘탈출기(exodus)’ 로 접어들고 있었다. ‘야곱’의 아들 중 ‘요셉’ 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는 그때로부터,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까지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에 나는 감읍하게 되고, 내가 겪고 있는 이 시련이 그분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임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비 온 후에 땅은 더 굳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언젠가 우리가 견뎌온 오늘이, 내일의 굳건한 삶의 양식이 되고, 우리의 영육을 살찌워 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게 된다. 이상하리 만큼 그 어려운 상황에도 우리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고, 가족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요즘 들어 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다.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먼 하늘을 보면서 멍 때리기를 해봐도, 생각은 항상 옛날의 특정 시점이나 특정 사실에 머무르곤 할 때가 많다. 그만큼 나의 인생 타이머가 후반전 말미쯤에 와 있다는 뜻이려니 생각한다.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 순간을 중시 여기고 열심히 즐기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부럽기가 그지없다.


부여받은 임무 수행을 위해 계획을 짜고 그에 따른 예산을 편성하고, 또 그것을 각단 있게 집행한다. 진행의 성과가 좋지 않을 땐, 수시 미팅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기어이 좋은 의견을 창출해 내게 된다. 숱한 검토와 수정을 통해 우리는 기어이 목표 달성을 이루어 내곤 했었다.


그렇게 쾌재를 부르던 그때의 그 감격은, 이젠 추억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 빛바랜 내 과거의 영광도, 그때의 정열과 신념 모두도 시간의 영겁 속으로 사라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현재는 중요하다. 미래 또한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오늘의 현재가 내일의 과거가 되듯이, 지난 시간에 묶여있는 내 과거의 추억 주머니 속에는 현재의 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보물이 있음은 나 외엔 아무도 모른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들은 비록 보잘것없고 허접스러운 것들 일지 모르지만, 내 지난날들의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모든 것들이 망라되어 있음은 숨길 수 없다.


바로 이런 것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겐 진정한 삶의 지침서인, ‘탈무드’가 되고 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은 나에게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돌아봄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1989년 여름, 연명하듯이 끌어 오던 그 사업도 이제는 연명조차 힘든 상황까지 와 버렸고, 나는 이마저도 접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봉착한다. ‘이창길’ 씨도 자신이 그토록 자신했던 사업을 접는 것에 대하여 다소 마련이 없었든 바는 아니었으나, 눈앞에 벌어진 현실의 벽을 무시할 수가 없는지라, 서로의 타협을 통해 회사정리의 수순을 밟게 된다. 나의 소유인 장비를 그에게 인계해주는 조건으로 ‘창길’씨로부터 다소의 현금을 확보한 나는, 청주를 떠나게 되고,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두 번의 사업실패를 경험한 나는, 적지 않은 자금을 허공에 날리고, 세월을 낭비하는 등의 실패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 얻은 값진 신앙의 재발견은, 내가 그분께로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울러 직장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짧지만 많은 값을 치르고 얻은 사업 실패의 전적조차도 내겐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해 여름엔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이 월북하여 참여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으며, 그 며칠 후 ‘리비아’의 ‘트리폴리’ 근교에서 KAL  DC-10 기가 추락하여, 탑승객 및 승무원 200명이 전원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다시 집안에 갇힌 나는 꽁지 빠진 새 모양 볼 폼 없고, 초라한 모습의 가장으로 간신히 그 명맥만 유지한 채, 성당과 집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도 성당의 많은 교우분들이 정신적인 위로와 따듯한 정을 베풀어 주는 덕분으로, 활력은 잃지 않고 있었다.


오직 신앙생활을 낙으로 삼으며 일상을 보람되게 보내고자 나름 노력하고 있었으나, 항상 어깨를 누르는 가장의 그 책임의 무게는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게마저 거부할 수 있는 용기는 내겐 없었고, 그것은 바로 내가 지고 가야 할 내 십자가였다.


내가 다니던 ‘발산동’ 성당에서 이민에 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쯤이었다. 그때 성당에서는 M.E 모임이 한창 활성화되고 있을 때였다. 우리 M.E 가족들은 서로의 유대감을 과시나 하듯이 활발한 교분을 이어 나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에 의한 이민정보는, 빠르게 성당 전체로 파급되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내 귀에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몇 분은 이민을 가기 위해 수속에 착수를 했다는 등 소문은 빠르게 퍼지며 은근히 나를 자극시키고 있었다.   

  

나는 평소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을 제기해 오던 편이었다. 공교육은 거의 사장된 지 오래이고, 사교육이 전체 교육을 망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헌법의 기본개념인 공정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무너지고, 심지어 박탈되고 있는 교육 현실이 너무나 암담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아이들이 커가면서, 바로 우리의 당면 과제가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오고 있었다. ‘걸’이는 이제 몇 달 후면 중2가 될 것이고, ‘민지’는 초등학교 6학년일 것이다. ‘걸‘이가 다니던 ‘덕원중’ 학교에서는 벌써 고입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고, 이는 곧 중학교 입학과 함께 입시 지옥은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사설 학원은 날로 번성할 수밖에 없었고, 학부모들은 생활비에다 자식들 학원비까지 그 부담이 가중되어, 이를 충당하기에 그야말로 등골이 휘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더욱이 형편이 닿지 못하는 가정에서는 아예 교육을 포기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은 살아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교육 당국도 속수무책으로 이를 방관하고만 있었다.


현명하고 판단이 예리한 젊은 부부들은, 일찌감치 이를 간파하고, 입시지옥을 피해 여타 다른 나라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사례도 종종 보이곤 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민이었다.

암튼, 그때의 모든 사정은 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었는데, 결과는 두고 볼 일이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창세기 12장 1절-4절)


나는 이민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브람’ 도 아니요, 그분에게 명령을 받은 바도 없는 한낱 티끌에 불과한 자이지만, 가족을 대동한 이민은 우리에겐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기에 신중한 행보는 물론이요, 매사가 돌다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내에겐 비밀에 부치기로 작정했다.


 어느 정도의 정보 분석이 끝난 후, 내 결심이 먼저였고, 다음이 아내와의 최종 결심이었다. 계획은 순조롭지만은 않았으나, 그런대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고, 이민 조건과 우리의 현재 상황을 대조해 본 결과 크게 어긋나는 부분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결정을 했었고, 이제는 아내와의 마지막 판단이 관건이 되고 있었다. 아내에게 말하기 전날 밤 사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과연 아내가 동의를 해 줄까? 아닐까? 보다는, 지방도 아니고 바다 건너 멀리 떠난다는 사실이 ’ 소피아‘의 가슴앓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더 걱정이 되면서 나는 그날 밤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힘든 요구를 여러 번 반복하고, 결국 우리의 땅을 떠나야 할 상황까지 만든 내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왜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너로 인해 받는 가족들의 고통을 생각지 않느냐.”라고 나에게 반문하며, 숱한 질책을 스스로 당하는 꿈을 꾸는 동안, 어둠이 걷히며 옥색 빛의 새벽은 이미 창가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몇 마디의 말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체 나는 ’ 소피아‘의 반격에 직면하고 말았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난감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혼란 상태로 빠지고 있었다. 설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내는 흥분하며 소리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반대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고, 나는 일단 설명을 중단하고, 며칠간의 추이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아내의 충격은 꽤 심했던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던 눈물까지 보이는 아내가, 그렇게 가여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차의 설득은 실패로 돌아가고, 나는 아내를 달래고 설득시킬 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보류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더 이상의 논란은 집안의 혼란만 부추기는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바탕의 소동은 끝나는 듯했으나, 내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이민에 대한 신념의 뿌리는, 잔가지만 제거된 채, 원뿌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89년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1990년은 밝아 오고 있었다.    

 

친구 ‘규태’로부터 시내 모처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은 새해 벽두도 한참 지난 2월 말 정도로 기억된다. 평소 우리 집을 허물없이 드나들던 그가 느닷없이 따로 만나자는 연락을 취해온 것이 의아했지만 별생각 없이 우리는 모처에서 마주 앉게 된다.


 앞전 ‘친구 이야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규태’는 내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항상 내 곁에서 함께 있어주었고, 때로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며 메마른 내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 주던 정 많은 친구였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이민문제와 더불어 ‘소피아’에 대한 것이었다. 작년 연말에 끄집어내었던 그 문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음은 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를 불안하게 생각한 아내는 ‘규태’와 상의하게 되고, ‘규태’는 나와의 소통을 통해 이 문제를 매듭짓고 자 함이었다.


이리하여 잠재적으로 덮여 있던 이민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잘된 기회라 생각하며, 우선 ‘규태’부터 설득시키기로 작정한다.    

 

여차여차한 여러 차례의 의견교환과 소통을 이룬 끝에, 아내와 나는 조건이 담긴 이민을 일단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그곳은 Argentina 였다. 시간은 충분했고 수속기간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우리는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물을 건너는 대장정의 첫발을 어렵게 디디게 된다.     

지금은 이 세상과 일찌감치 결별한 ‘규태’가, 그때 우리 가족에게 보여준 충정 어린 눈길과, 진심이 담긴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그립고, 한량없이 지금도 보고 싶을 뿐이다. 내 손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의 따듯했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 나는 내 손을 살그머니 다시 한번 만져 보고 있었다.  

     

참, 아내가 내게 요구한 조건은 현재의 ‘서울’의 삶(살림살이 포함) 그대로를 ‘Buenos Aires’로 고스란히 옮겨가는 것이었다.     


3. 이민 하나   

  

1991년 6월 더웠던 어느 날. 김포공항. 매번 혼자만 왔다 갔다를 반복하던 그 공항에 식구 전부가 나왔다. 여행은 분명한 여행인데 그렇게 즐거운 여행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운명 같은 그 날을 이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기쁨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떠있었고, 아내와 나는 앞으로 다가올, 보이지 않는 우리 미래의 그림을 생각하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긴 했으나, 들뜨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원중 3학년이던 ‘걸’이와 ‘화곡 여중’ 1학년이던 ‘민지’는 자퇴를 하고, 아빠와 엄마를 따라 먼 길을 무작정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모님을 믿고 그 뜻을 좇아 나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난 3개월 동안 우리들은 ‘해외개발공사’에서 진행하였던 현지 사정에 관한, 여러 가지의 정보는 물론이고 어학 공부를 겸한 남미 사정 익히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우리 부부는 이민을 결정한 후 아이들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아이들에게 이민을 설명하면서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교육’ 문제였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낯 뜨거움을 느끼며, 아이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서 뱉어낸 비겁한 한 가장의 변명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은 찬성하였고, 그들의 의견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요, 큰 힘이 되기도 했다. 하여튼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을 기도하고 믿으며, 그렇게 한국을 떠나가고 있었다. 낯설고 물 설은 지구 반대편 그곳에서는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나도 또 우리 가족 모두는 아무것도 모른 체, 두려움과 기대와 설렘이 교차하는 그곳, Argentina를 향해 비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기온은 높았으나, 하늘은 푸르렀고 멍멍하던 청각이 제 기능을 찾아가고 있을 즈음, 우리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고, 서해안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을 향해, 나는 ‘Adios Seoul’를 읊조리고 있었다.     


“팔로우미” 이 말을 들으면 칼을 들고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한 장수의 모습과 함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의무는 쉽게 팽개치면서, 권리는 죽어라 붙들고 놓지 않는 요즈음 세태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우리에겐 쉽게 와 닿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생각한다.


십자가는 피하고 싶고, 꽃길과 훼이브먼트만을 꿈꾸며 달려온 나는, 그분의 고난의 행군이, 그 뒤에 다가올 영광을 위한 사치스러운 행보로만 인식되면서, 그 길에 뿌려진 성혈과 그리고 고통과 인내는 잊고 있었다. 그분의 피와 땀의 자국도, 상흔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어리석음까지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분의 사랑을 진정으로 알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오늘의 복음 말씀’이 유독 가슴에 와 닿는다. “네 정성을 다하고, 네 마음을 다하여 의심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그분을 앞세우고 그 뒤를 쉼 없이 따라가는 내 모습에서 나는 나의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본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하시옵소서!

    

미국 L.A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Transit Area’, 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로의 밀입국이 성행하던 때 인지라, 공항이나 경찰 당국의 감시 체재는 눈에 띄게 엄격했었다. 우리는 통과여객이므로 미국 Visa가 필요 없었고, 따라서 우리의 가슴에는 ‘WIV’(without visa)라는 명판이 목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게토’의 유대인들처럼 경찰의 눈총을 받고 있는 비참한(?) 실정이었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좁은 대기실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브라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나약한 나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처져있는 아이들과 아내를 보니, 괜히 내 자신도 위축이 되는 것 같고, 가장을 잘못 만난 그들의 처지가, 남달리 측은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Hand Carry로 가져오던 짐 중에 김치가 있었는데, 그 국물이 배어 나와 냄새가 나고 있었고 아내는 그것을 수습하느라 혼자 바삐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 아내의 모습은 체면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직 가족만을 위한 순간적인 그 행동이, 나의 눈시울을 붉게 해주고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고, 나중에 그들은, 그때 그 아내의 행동에, 진심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렇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돌출되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서 본래의 적나라한 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날 보여준 아내의 그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리에 각인되고, 보관되어 있어 수시로 꺼내어 기억하고픈 좋은 추억이 되고 있다. 이어지는 비행 계획에 따라 우리는 ’ 브라질’ ‘상 파울러’에 도착하고, 다시 작은 기종으로 비행기를 바꾸어, ‘Buenos Aires’로 향하게 된다.   

  

1990년. 그러니까 아내와 최종 이민 결심을 한 후, 우리는 절차에 의해 준비를 시작했다. 이것은 투자 이민이었으므로 그 나라에서 정해 놓은 금액을 예치하고, 그 잔고 증명서를 그 나라 대사관에 제출함으로써, 비자발급을 시작으로 제반 절차가 진행되게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만큼의 금액은 당연히 있어야만 착수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보유한 금액이 그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참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집은 이미 부동산을 통해 매도를 요청해 놓은 상태이긴 한데, 매도가 이루어질 때까지가 문제였다. 급전을 융통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당황스러웠고, 아내 역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 흐르고, 이를 주선하던 에이전트에서는 시간의 촉박함을 내 세우며 독촉을 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러고 있었다.      


‘봉비오’ 씨는 M.E 부부모임의 같은 회원이었으며, 성당의 사목 위원 이셨다. 나 역시 사목 위원이었고 같은 청소년 분과의 분과장과 분과위원의 관계였다. 평소 나와의 친분 관계가 남다른 사이였으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연배이셔서, 평소 존경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든 것은 사실이었다.


항상 점잖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가는 솔선수범형의 신사이셨는데, 당시 상업은행의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나는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나의 사정을 들었다 하시면서, 나의 이 문제를 상의해 보러 왔다고 하셨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그분의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하여튼 ‘봉비오’씨의 도움으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었고, 또 한 번의 어려운 고비를 우리는 잘 넘기고 있었다.


하느님의 도우심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전해질지 참으로 오묘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 기회에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내와의 약속대로, 집에 있는 모든 집기는 물론이요, 아주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것 하나까지도 다 챙기다 보니 우리의 뱃짐은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해운선박회사 직원도 놀랄 정도로 많았고 운임비 또한 만만찮았으나, 어쩌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아내의 마음은 허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허전함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해주랴 싶고, 나 또한 같은 마음임을 숨길 수 없었다.  

   

대기시간 포함 약 30여 시간의 긴 비행 끝에 우리는 드디어 ‘Buenos Aires’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참 지겹고 지루한 여행이 끝나는 순간임에도, 반가움보다는, 솔직히 두려움이 앞섰음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기내를 벗어나는 순간, 맵 사하고 습기가 베인 겨울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이국의 낯 설움이 울컥 다가서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여름에서 겨울로 훌쩍 넘어온 우리들은, 변해버린 환경과 시계가 너무나 낯설어 선뜻 발을 떼놓기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꽤 하였던 나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아내와 아이들이야 오죽했으랴 싶어, 힐끗 그들의 동태를 살펴보니 다행히 별 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세관 직원들의 행패가 심하니 백 불 정도의 금액을 준비하는 것이 여러 가지의 불편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정보를 미리 전해 들은 우리들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해놓고 있던 터라, 별문제 없이 세관을 통과하여 공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중 나온 ‘koica’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미리 정해둔 ‘아폴로’ 호텔로 향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의 겨울은 을씨년스러웠으며, 처음으로 맡아보는 남미의 독특한 냄새와 함께 우리를 얄궂은(?)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가 당분간 머무를 ‘아폴로’ 호텔은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이류급 호텔이었으며, 주로 이민으로 입국하는 한국 사람들이 거처를 정하기 전까지 유숙하는 곳으로써, 숙박비도 그렇게 비싸지 않았고, 우선 한국식으로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주방까지를 제공해 주고 있어, 우리에겐 안성맞춤인 셈이었다. 우리는 큰 방 하나를 선택하였고, 여장을 일단 풀었다. 큼지막한 침대가 2개였으며, 공간도 제법 넓어 4 식구가 운신하기에 그렇게 좁아 보이지는 않았었다.


누울 자리가 마련되고 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고 아내는 주방을 살펴보기 위해 그곳으로 가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호텔 앞 거리로 나왔다. 도로는 내가 ‘로마’를 갔을 때 보아온 것처럼, 작은 사각형의 돌들이 박힌 도로가 주로였으며, 그 모습은 로마제국시대의 그것처럼 특이했다.


날씨는 겨울이라도 혹독하게 춥지는 않았으나, 습기가 섞인 낮은 기온은 몸속으로 스며드는 싸늘함을 느낄 정도였다.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 속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우리도 이제는 그들의 일부임을 생각하며 다가올 좋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호텔로 다시 돌아온 우리는 아내가 마련한 따끈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국의 겨울 첫 밤은 맵싸한 기온과 함께 우리를 감싸고 있었고, 어둠은 이내 찾아왔다.     

 

다음 날은 마침 주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일단 미사 참여를 위해 성당을 찾았다, 이 지역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밀집지역으로 근처에 한인성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비몽사몽의 정신이었지만, 하느님에게 먼저 도착 신고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나는 가족들과 함께 성당을 방문하게 된다.


서울에서 준비한 교적을 그곳 사무실에 제출한 우리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 무릎부터 꿇으며, 기도부터 드렸다. 널따란 성전 안은 아늑하고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이 층에는 성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성가대석을 보고 있노라니, 서울 발산동 성당 성가대의 좁은 공간이 생각나며, 이 넓은 나라의 복 받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지기도 했었다.

미사가 끝난 후, 새로 전입한 교우들을 환영하는 순서가 있었으며, 신부님의 안내에 따라 우리 몇 가족들은 앞으로 나가 교우 분들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교민 숫자는 약 이만 오천 명 정도였었고, 대부분이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지방 소도시에도 일부 교민들이 살고 있긴 했으나, 그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리는 분들이며, 거의 은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직업은 남미 대부분 교민들과 마찬가지로, 의류 도소매업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부 교민들은 조그마한 딴 직종의 가계를 한다거나 소규모 자영업을 하는 분도 계시곤 했다.


좁은 교민 사회이다 보니, 모두들 오밀조밀 같이 모여 살고 있었고, 주로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일감들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부상조의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개신교 교회는 가장 많이 있었고, 원불교 및 조계종의 사찰도 있었다. 천주교는 ‘전주교구’ 소속의 신부님들이 정례적으로 파견되고 있었으며, 이 나라의 국교가 ‘가톨릭’이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의 지원도 많이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종교가 없을지라도,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어떤 종교이던지 소속될 수밖에 없는 교민들의 실상을 알고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여질 정도였다. 그밖에 출신 고향을 중심으로 ‘호남향우회’, ‘경상 향우회’, ‘충청향우회’등 한국이나 여기나, 좁은 땅에 참 많이도 쪼개어져 서로 복닥거리며 열심히들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인연은 끊어지고,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먼 타국에서 느끼는 가족들과의 유대감 또한 한국에서 느끼는 그것에 비해 더 끈끈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더 절실하고 더 간절하고, 더 절박해질지도 모르는 이곳에서는 서로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간조차도,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다행히 가족과 가족을 통해 입국한 사람들은 정착까지의 기간은 짧아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탐색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돌다리 마냥, 두드려 가면서 믿을 구석을 찾아 킁킁거리고 있었다. 찾을 수 있는 인연의 끈이 없을까 하며, 두리번거려 보지만, 쉽게 찾을 수는 없고, 결국 속해있는 교회나 단체에 그 끈을 연결시키는 방법 외에는 달리할 도리가 없다.    

 

나는 한국에서 이미 ‘koica’에서 친분을 쌓아왔던 ‘조용민’씨와 성당에서 알게 된 ‘이이규’씨와 모종의 동업을 꿈꾸고 있었다. 이 씨는 사진 전문가로 이미 성당 내에서도 이미 사진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던 전력 등이 있는 사람이었고, 조 씨는 미군 계통에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는데 여간 성실한 분들이 아니었다. 서로가 성당이나, ‘koica’에서 만났지만 짧은 만남에서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분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다 함께 할 것을 약속한 우리는 우선적으로 가족들의 거처 마련 등의 인프라 구축부터 나서게 된다.


이곳에도 부동산 업종은 활기를 띠고 있었고, 교민이 운영하는 곳도 꽤 있어서, 일단 집을 구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건물의 대부분은 오래되었지만, 한때 세계의 경제권을 좌지우지할 만큼 부자였던 이 나라인 만큼, 고급 건물 자재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대리석으로, 지금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옛날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의 집값에 비하면 싼 편이었지만, 앞으로의 사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에다 많은 돈을 투자하기란 좀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여튼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한 교민이 살고 있는 집을 보게 되었는데, 3층 건물에 3세대가 살고 있는 건물로서 1층과 2층은 원주민이 살고 있고, 3층이 우리가 들어갈 집이었다. 3개의 적당한 크기의 방과 큰 거실 1개와 주방과 꽤 큰 화장실 겸 욕실이 있는 그런대로 괜찮은 집이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결정권을 주었고, 며칠 후 그들은 그 집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는 곧바로 이를 매수하기로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이 나라의 한 호주가 되었고, 이제 뿌리박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다.                            

                                                                                

4. 이민 둘  

   

“너희는 가진 것 팔아 불쌍한 사람 도와주어라” 현실적으로 어렵고 쉽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라 하신다. 그러시고는 보이지도 않고 근거도 전혀 없는, 하늘 은행에다 예금 유치를 권하시면서, 그곳에는 부도날 우려도 없으며, 곰팡이도 슬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셨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들 중, 제1순위는 단연 재물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이마저도 이웃을 위해서는 기꺼이 내어놓으시라니, 참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꽤나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며 또 삶의 거친 파고를 넘나들며 오늘을 살고 있다. 질곡 같은 어두움을 헤쳐 나가기도 하고 때론 기쁨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면서도, 희망을 향한 우리들의 인생 여정은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간혹 좌절의 아픔과 부딧칠 때는 용기 있는 결단력으로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항상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결코 잊지는 않는다.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늘 그래 왔듯이 다정히 응답하시고는, 우리들의 등대지기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믿음이 결여된 기도는 허구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기도와 우리 신앙의 든든한 밑뿌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신앙인의 희망은, 궁극적으로 천국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현세에 발 담그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웃을 도우라 하시는 이 말씀도,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거늘, 이를 망각하고 무시하면서 내 손은 안으로만 움츠려 들고만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부끄러울 뿐이다. 그분을 만유 위에 첫째로 공경하라 하신 ‘천주 1계’의 준엄함을 다시 한번 새겨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그분 앞에 군림할 수도 또 해서도 안 됨을, 우리는 가끔 잊고 살지는 않는지 한 번씩 뒤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도, 자식도, 그 무엇도 그분 앞에서는 모두가 우상이요, 허상일 뿐이다. “그 재물을 하늘에 쌓아 주님 상금 받아라”(마태복음 6장 19-21)    

 

홍 신표’는 내 친구다. ‘규태’와 마찬가지로 학교 다닐 때는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나는 1년간 휴학을 한 후, 사실상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으므로, 씩씩하게 친구들과의 교분을 쌓기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성격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나는 항상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좀 내성적 타입의 아이였다.


졸업한 지 50년이 되었지만 가끔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엉뚱하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드물게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특히 ‘신표’는 기계과를 대표하는 학회장까지 하는 등 학교에서의 활동도 상당해 친구들의 시선도 많이 받든 친구였었다. 군 입대, 졸업, 취업, 결혼 등을 거치며, 우리는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어느 날 그와의 조우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때가 아마 ‘사우디’ 근무를 마치고, 감사실 근무를 하고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동안의 소문으로는 ‘신표’의 장인이 대구에서 상당한 재력가였으며, 장인의 영향으로 그 역시 탄탄한 경제적인 기반을 일찌감치 닦아놓았다 했었다. 그러나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70년대 당시 30여 살 정도의 젊은 사람이 고급 Jeep차를 끌고 다닐 정도였으니, 시샘을 받을 만도 했지만, 그의 행동거지는 친구들에겐 썩 좋은 인상만을 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야 일찍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그 사정을 깊이 알 수는 없었지만, 한때 그가 잘 나갔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나도 적잖이 놀랐지마는, 그 또한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에 대한 여러 가지의 소문이 상기되며, 내심으로 경계심마저 들기 시작했으나 그의 행색이 좀 초라하게 보여, 순간 의아해지기도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장인 사업이 원활치 못하여 이내 사업을 접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몸을 잠시 피해야 하는 실정이라고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만난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꽤 급박해 보이는 그가 참 딱하게 보였고, 나는 그를 집으로 일단 안내했다. 아내의 눈치가 안 보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우리 가족과의 동거가 시작되고. 그와의 특별한 인연도 그렇게 얽히고 있었다.   

  

‘Argentina’에 발 디딘 지 40여 일 만에 우리 가족은 우리의 둥지를 찾았다. 비록 우리가 꿈꾸던 수영장이 딸린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활하기에 그리 불편할 것 같지는 않을 널찍한, 아파트형의 집을 마련하고 우리는 만족하고 있었다. ‘


아폴로’ 호텔을 벗어나 우리들만의 공간으로 이동한 우리들은, 첫 밤을 흥분과 설렘으로 보내고, 다음의 새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친 우리들의 뱃짐이 도착하기까지의 생활은 어차피 뜨내기의 일상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불편쯤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으며, 나는 우선 아이들 학교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기로 한다.


주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여러 학교를 수소문한 결과, 우선 ‘민지’는 바로 등교가 가능하면서, 또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의 한 학교가 나와 수속을 시작했다. 그러나 ‘걸’이는 마땅한 학교를 찾지 못해 얼마간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어느 비가 오던 날이었다. ‘걸’이는 그렇게 그날도 집에서 누워 지내며 비 오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걱정과 두려움에,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한국의 같은 또래의 친구들은 지금쯤 고입 경쟁에 몰입하며, 자신의 앞날을 위해 열심히들 노력하고 있을 텐데, 부모 잘못 만난 저놈은, 그 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저렇게 힘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니 괜히 ‘걸’이가 불쌍하고 아비가 저놈의 앞날을 망치는 것이 아닌지, 순간적인 죄책감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참으로 암담하고, 견디기 힘든 그러한 시기도 그렇게 지나가며, 우리들은 이 나라에 차츰차츰 잔뿌리를 땅속 깊이 뻗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와의 동거를 시작한 ‘신표’는 좀처럼 탈출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하릴없는 세월만 속절없이 보내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그를 도울 방법을 나름 모색하고 있었으나 좀처럼 시원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느덧 그가 우리 집에 기숙을 한 지도 두 달이 되어 가고 있을 무렵, 매제인 ‘최서방’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나는 접하게 된다. ‘최서방’은 내 둘째 여동생 ‘루시아’의 남편으로 사돈어른이 당시 큰 설비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그도 그곳에서 관리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신표’도 기계설비가 전문 분야였으므로, 나는 ‘최서방’ 에게 그의 일자리 부탁을 진작 해 놓고 있었던 터였다. 마침 ‘사우디’에서 제법 큰 공사를 수주하게 되고, 이것은 곧바로 ‘신표’와 연결이 되었다. 그것은 그의 운이기도 했으며 ‘최서방’ 회사와의 타이밍 또한 딱 맞아떨어진 셈이 되고 말았다. ‘


'신표’는 그곳 현장 소장으로 임명되어 ‘사우디’로 떠나게 된다.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등 그간의 고생을 상쇄나 하는 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으며, 재기를 다짐하고 있었다. 나와 만난 지 채 석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의 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Argentina’의 경제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의 자산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온 우리들은 이러한 경제 사정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하나 짚어 나가기가 일상이 되고 있었다. ‘조용민’씨와 ‘이이규’씨와의 약속대로 우리는 각각의 지분만큼 자본을 투자하여, 동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미 국내에서 두 번의 동업과 실패를 맛본 나는, 이번에는 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면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를 다짐하게 된다. 아이템은 사진 현상소였으며, 덧붙여, 중고 카메라를 사고파는 가게를 하기로 합의를 보고, 이에 따른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가게 장소부터 정하는 것이 수순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가게 위치 물색에 나선다.


알다시피 이 나라는 2차 대전 시 연합국에 식량 및 군수 물자들을 공급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나라였다. 그때의 쌓아놓았던 재물들이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지금, 각 가정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고급 중고 카메라였다. 또 막 공급이 시작된 디지털카메라는 이나라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으며, 30분 혹은 1시간 내에 현상과 인화를 해내는 빠른 Minilab의 발전은 사람들의 흥미를, 더 부추기고 있었다.


한편으로 장소 물색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Minilab 수입을 추진하기로 하고, 우리는 비로소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우리의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가게 장소까지 정해지고 나니, 우리의 마음도 조금씩 안정이 되며 차분해지고 있었다.


벌써 이 땅에 발을 디딘 지 근 7개월이 되어 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동안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의 일들이 있었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내가 소매치기를 당했든 일은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그것도 거금이라 할 수 있는 $1,000을 고스란히 갖다 바쳤으니 말이다. 이 나라의 소매치기 수법은 옛날 우리나라 육칠십 년대의 그것과 비슷해 여러 사람이 주위를 둘러싸고, 혼을 뺀 다음, 전혀 다른 놈이 그 짓을 하는 것인데 그 수법에 내가 당했으니, 뭐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세 얻은 가게를 우리의 구색에 맞게 리 모델링 공사까지 끝낸 우리는, 수입될 Minilab을 기다리며,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2년간의 ‘사우디’ 근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신표’는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을 하여, 가족들의 환대를 받게 된다. 건강하다 했지만 아무래도 그 사막의 나라에서 고생의 표가 안 날 리가 있겠는가? 하여튼 그렇게 고생한 ‘신표’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갔다. 나 또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으며, 나의 작은 힘이 그에게 큰 힘이 되고, 또 그것은 그들 가족들의 기쁨으로, 승화된 것이 나를 뿌듯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었으며, 나는 이 순간 바로 일 년 전의 ‘봉비오’씨의 도움을 생각하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묵상하고 있었다.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과 여러 성인들의 기도와 또 우리가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을 통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언제 어디서, 누구의 어떤 도움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며, 오직 그것을 주관하시는 그분만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후 ‘신표’는 재기에 성공하게 되고 가끔 나에게도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우리 집안의 모든 길·흉사에는 꼭 참여하여, 적지 않은 성의를 표시하곤 했다. 또 대구의 형편이 좋지 않은 친구들에게도 온정을 베푸는 등 또 다른 사랑을 실천하며 잘 지내고 있다. 이 모두는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면 그 무엇으로 설명이 될 것인가?                                                

                                                 

기다리던 ‘Minilab’ 은 자꾸 지연이 되고 있었으며, 모든 준비를 마친 가게를 그냥 비워두기가 참 아까 웠다. 가겟세는 월 천불에 이르고 있는 데다, 우리들의 생활비는 앉아서 그냥 까먹고 있었으니 마음이 또 급해지며 조급증이 되살아났다. 하 세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는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되는데, 기계가 들어올 때까지 ‘Kiosco’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kiosco’ 란 쉽게 얘기하면 구멍가게를 말함인데 우리 가게는 아베니다(Avenida)로써 대로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또 잦은 편이었다. 우리는 즉각 시행에 들어갔고, 콜라를 비롯하여 판매가 될 만한 물품은 모두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 큰 대로에 동양인 몇 명이 Kiosco를 벌리니,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들락거리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주위의 다른 가게의 사람들과도 교분을 넓힘으로써, 앞으로의 우리 영업의 전망을 밝게 해 주었다. 특히 이 나라 사람들은 순수했으며, 총기 상회가 시내에 즐비하게 있어도, 끔찍한 사고나, 살인사건 같은 흉악범이 극히 드물었다.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는 이 들은 사람들과의 어울림과 교제를 중히 여기며 퍽이나 사교적이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사전 포석으로 생각하고, 그들과 어울리며, 짧은 ‘스페인어’를 길게 가져가는 방법 등을 터득해 나갔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 기계가 반입되고 우리는 본격적인 원래의 우리 사업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현상기를 처음 대하는 나는 우선 필름 현상과 사진 인화 작업을 배우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화학 약품을 취급해야 했기 때문에 안전에도 주의해야 했고, 인화지 교체 작업까지, 하나하나를 배우며 하다 보니, 꽤 재미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배우고 실습하고, 또 실수도 하면서, 나는 서서히 기술자가 되어가는 나를 보게 되며, 가게도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또 카메라 사고팔기의 중고 장사가 가게 수입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면서, 우리는 그 분야에 더 많은 정성을 들이게 되고, 이국에서의 재미도 적잖게 느끼며 차츰 생활의 활력을 찾아가게 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교민의 대부분은 의류 도소매업에 종사함으로써, 전 가족이 그것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에 반해, 우리 세 가족은 한국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가져와 남자들만 출퇴근을 하면 되니까, 주변 사람들의 많은 부러움을 받고 있었다.


특히 ‘소피아’의 만족도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아이들도 다 학교에 다니며 이 나라 말을 곧 잘하며, 원주민 친구들을 사귀는 등 어른들보다 더 빠르게 이 나라에 동화되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참 오기를 잘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었다. 도시락 두세 개씩을 싸가며, 공부에 시달리는 한국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우리 아이들도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나름 그들의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별로 없었으며, 성당이나, 교회에서 종교를 병행하는 여가활동 등도 하면서, 건강한 일상들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도 우연히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어, 본격적으로 나의 끼를 발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스스로 성가대를 찾아간 나와 아내는, 그동안 꾸준한 활동을 통해 그 실력(?)을 인정받아 남성 솔리스트로, 아내는 엘토 파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젊은 지휘자가 자신의 일 때문에 지휘를 못 할 처지에 이르러, 나에게 지휘를 일임하면서 성가대를 떠나 된다. 졸지에 떠맡은 지휘가 내겐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학생 시절부터 익혀온 성가대의 분위기와 알고 있는 음악 지식을 총망라하여 그 직을 수락하고, 성가대를 이끌기 시작했다.


마침 ‘세실리아’도 반주를 맡게 되어 우리 식구 넷 중 ‘걸’ 이를 제외한 3명이 성가대에 소속되어 같이 활동하기에 이른다. 나는 항상 얘기한다. 그때 내가 지휘봉을 잡고 딸애가 반주를 하며, 아내가 노래를 하던 그 시절이, 우리들에겐 가장 행복했고 제일 좋은 시절이었음을,


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또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민의 성공적인 선례를 남기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5. Cry for us Argentina!    

 

‘아르헨티나’ 교민들의 출신성분(?)들을 훑어보면 대강 4가지의 부류로 구분되지 않나 싶다. 그 첫째는 육칠십 년대에 농업 이민으로 오신 분들이었으며, 그들은 꽤 엘리트로 분류된다.


그때 이 나라에서 요구한 농업 이민의 투자조건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금액이었기에, 그 당시 한국 농민들 수준으로 그만한 금액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던바, 농민으로 위장한(?), 일부 엘리트 집단이 그 자리를 대신 메워 주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나라에 와, 농사를 짓는 척 시늉만 내다가, 대부분 카피탈에서 다른 업종으로 생활하게 된다.


이분들의 1세는 대부분 별세하시고, 그 2.3세 후손들이 제법 부유층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물론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으로의 재 이민을 실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교민 사회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곳곳에서 그들의 엘리트 의식을 은근히 과시들 하고 있었고, 내가 나중에 활동하기도 했던 ‘문인협회’ 같은 곳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번째는 한국에서 쫓기다시피 온, 색깔이 알쏭달쏭한 자들이다. 이 중에는 5공 시절 권력에 빌붙어 한세월을 잘 보내었으나, 뒤가 구린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력을 감추고, 투자 이민으로 이 나라에 이주해 와서, 카피탈이 아닌 팜파스나 외각 지역에서, 그 검은돈의 위력에 힘입어 잘 살고들 있다. 거의 은둔 생활을 하고 있고, 교민 사회에는 접근조차 않는다. 신분은 철저히 감추고 있고, 비록 어둠의 자식들이긴 하나, 어쨌든 잘들 살고 있었다.


또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범죄인들이 꽤 섞여 있었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온자나, 떳떳지 못한 관계의 불륜을 저지르고 남녀가 같이 부부로 위장해 온다거나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조차도 교민 사회에 은근슬쩍 그냥 묻혀서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다.


세 번째는 바로 우리 같은 경우로 팔구십 년도의 투자이민 그룹으로써, 이들이 교민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고, 그렇고 그런 우리들의 이웃들이었다. 88 올림픽의 여파로 한국이 다소 국제적으로 알려진 후 몰려온 대부분의 젊은 층 집단이었으며, 나 또한 당시 43세였다.


마지막 부류는 극소수이긴 하나, 가장 오래된, 이름하여 최초의 교민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인데, 1953년 휴전 후, 이승만에 의해 시행된 반공 포로 석방 사건 때, 약간의 북한 출신 포로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는데, 그들 후손들의 일부와, 일제 때 ‘멕시코’로 건너온 소위 ‘에니깽’ 출신 후손 일부가 그들이었다. 그 들은 거의 원주민과 같았으며, 거의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들도 한인들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우리 셋의 동업 조건은 잘 지켜지고 있었으며, 가게 또한 승승장구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일정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고, 나도 성가대와 가게를 오가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먹거리였는데, 그 유명한 ‘아사도’였다. 그 나라의 축산업은 크나큰 국토에다가 넓디넓은 팜파스가 무한정으로 펼쳐져 있어서, 소의 숫자가 인구수보다 월등히 많았으며, 국민들에게 공급되는 소고기는 송아지 고기로, 그 육질의 맛은 세계 최고를 구가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송아지 고기를 부위별로 즐기며, 한국에서 느껴보지 못한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아사도’ 다음으로 우리가 선호했던 먹거리는 신선한 생선회였다. 주말이 되면 아내와 나는 근처에 있는 ‘스피네토’라는 슈퍼마켓을 방문했다. 그곳 한쪽 코너에서는, 생선회를 즐기는 동양인들을 위한 특별 코너를 마련해 놓고 있어서 언제든지 싱싱한 생선회를 구입할 수 있었다. 한국에 비해 가격도 아주 저렴했으며, 다양한 종류의 어류들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재미 또한 솔솔 했다. 한참 성장해 가는 우리 아이들에겐 이때의 먹거리가 상당한 건강상의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감히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이들 역시 입시의 지옥 같은 말은, 먼 남반구 한국에서나 있는 말로 치부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잘 키워나가고 있었다. 아마 이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많이, 또 폭풍 성장을 했지 않나 싶다.  

    

그곳에서 나는 우연히 ‘박통준’ 씨와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이규’씨와 마찬가지로 카메라 전문가였는데. 이곳에 온 지는 꽤 오래되었고, 아들과 연로한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기 전 지방도시‘코르도바’에서 카메라 중고 장사를 하던 분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였지만, 너무나 점잖고 예의가 밝아 조금은 조심스럽기까지 하였다.


큰 키에 마른 체격의 그는 아내와 결별한 탓인지, 항상 쓸쓸하고 외롭게 보였으나, 얼굴은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셨든 분이셨다. 그분은 가끔 가게를 오가며, 우리와의 교분을 쌓아가고 있었는데, 무언가 여의치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분의 내밀한 것까지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큰 눈망울에 깃들어 있던 그 우수 어린 표정이, 항상 나의 궁금증을 유발하게 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서울에서 기자 생활까지 하던 그가 이곳으로의 이주 문제 때문에 아내와의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가정이 둘로 쪼개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여파로 아내와 딸은 한국에 남고, 아들과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에 왔었는데, 가정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과 함께 연로하신 어머님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의 핸디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성실하게 생활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그분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울러 내가 도와줄 수 있는지를 완곡하게 여쭈어봤으나, 그 역시 정중히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그분은 원래의 직업인 기자로 돌아가서, 이곳 ‘중앙일보’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분의 요청에 의해 나는 신문지상을 통해 나의 글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큰아이가 얼마 전 알려온 소식에 의하면, ‘아르헨티나’에서 거주하던 그분이, 아들과 함께 ‘멕시코’로 다시 이주해 와서 지내던 중, 안타깝게도 백혈병으로 인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쓸쓸하고, 외롭게 보내던 그의 생애가 애처로웠고, 우수 어린 그의 눈망울이 떠오르며, 그의 명복과 함께, 내세에는 행복이 늘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박통준’ 씨는 나의 이민 생활에 윤활유를 제공해 주었고, 나는 그 윤활유에 힘입어 나의 또 다른 끼를 발산하게 된다. 바로 글쓰기였다.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머나먼 타국에서 그 시작이 될 줄을 누가 알기나 했으랴마는, 원고 요청을 해 오는 ‘중앙일보’도 고맙고, ‘박통준’씨도 고맙긴 마찬가지였다. 매주 주말이면 나의 글은 활자 매체가 되어 모든 교민들에게 전달되었고, 덩달아 나의 위상과 자존감을 높여 주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문인협회에도 가입하여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이 시기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내 생애 최고의 날들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그때가 이민 4년 차, 1994년 무렵이었고, 그해 7월 북한의 ‘김일성’ 사망 소식을 이곳에서 듣는다. 당시 교민 사회의 인기 드라마는, MBC의 ‘서울의 달’이었다.   

  

이때쯤, 나는 이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친구 신부님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한인교회의 신부님은 ‘성태수(이냐시오)’ 신부님이었는데, 한날 저녁 그날은 성가대의 정기적인 연습일이었다. 예정대로 2시간 정도의 연습을 하고, 막 연습실을 나서는데, 우리 신부님이 다른 어떤 두 분과 함께 연습실로 오셨다.


나는 평소대로 인사를 드렸고, 신부님은 같이 오신 두 분을 소개하셨는데 그중 한 분이 낯설지가 않은 얼굴이었다. 두 분은 ‘성신부’님의 동창 신부님들이셨고, 미국 연수중에 이곳에 잠시 들리셨는데. 마침 성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 계셔서, 성가대에 다소 도움을 주기 위해 오셨다 하였다. 두 분 다 공교롭게도 ‘대구대교구’ 소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먼 기억의 저편에 있던, 한 젊은 청년 신학생이 떠올랐고, 그 낯설지 않았던 분의 얼굴과 겹쳐지며 떠오르는 이름은 ‘김종헌’이었다. 또 한 분은 ‘소병욱 신부’로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 신부를 역임하셨던 분이었다.


당시 신학생이었고, 나는 일반 대학생이었으며, ‘가톨릭 합창단’ 소속으로 한창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는데, 방학을 맞은 그들은 본당을 찾아왔고, 합창단과 어울리기도 하면서, 성당 마당을 누비기도 했었다. 이제는 사제가 되어있는 그 들을 보고, 나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하여튼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사제관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었다. 그 들은 약 20일간 머무르며, 나와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었고, 특히 아내의 보신탕 조리 솜씨는, 오랜만의 세 분 신부님들에게 보신의 기회로 제공되기도 했었다.


특히 우리 집을 방문하셔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아주 좋은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우리 집에는, 지금은 춘천 교구장이신 ‘김운회’ 주교님도 방문해 주셔서, 주위의 부러움과 함께, 아이들이 앞으로의 종교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큰아이는 지금 ‘멕시코시티’ 한인교회에서 성가대를 맡고 있고, 외손자 ‘아노’는 수원 세류 성당의 복사단에서 열심히 하느님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아이들은 아내와 내가 가진 하느님에 대한 기본 DNA를 전수받아, 그분의 뜻에 걸맞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모두가 기도 덕분임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우리들의 발걸음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어나갈 것임을 약속하고 싶다. 또한 하느님의 배려가 항상 함께 하기를 빌고 있다.   

  

1995년 여름의 더위가 한창이던 1월, 큰아이 ‘걸’이가 한국으로 들어갔다. 항공대학교 ‘운항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민 온 지 4년 만에 우리 가족은 조금씩의 핵분열을 시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우리들은 가족회의를 통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하여 논의를 했었다. 그곳 교민사회에도 아이들의 진로에 대한 관심들은 많은 편이었다. 미국으로냐, 한국으로냐를 놓고, 일부는 미국으로 또 일부는 한국으로, 그러나, 그곳에서 대학을 택하는 아이들은 잘 없었다.

당시 이 나라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그 영향으로 젊은이들은 이 나라에 머무르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소위 ‘Exodus’를 시도하고 있었다.


대화를 통해 한국 의로의 진로를 선택한,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우리도 한국으로의 역이민을 결정하고, 먼저 ‘걸’ 이를 서울로 보냈다. 이어 내년에는 둘째 ‘민지’도 보내야 했으므로, 그에 따라 벌려놓은 이곳의 사업변경도 생각해야 할 시점이 도래하고 있었다.   

  

 3년으로 계약된 가게 임대의 종료 기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또 한 번의 큰 변곡점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동안 가게의 매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편이었고, 교민 사회에서도 우리들을 성공 케이스로 보는 경향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큰돈을 얻은 것은 아니었고 다만, 잘 지내고, 아이들 건강하고, 그냥 무탈한 이민생활을 이어왔음에 만족하고 있었다.


계속 사업을 이어나갈 것인지를 협의한 결과, 이쯤에서 서로의 길로 각각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소문 좋고, 인기 좋을 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신문에 곧바로 게재하고, 매수자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게 된다. 두 분은 이곳에 뼈를 묻고 싶은 분들이나,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음으로 어차피 갈 길이 다른 것도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마침내 관심 있는 한 교민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준혁’이었다.


그는 한동안 우리 가게에서 알바를 하던 친구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민 온 지 꽤 오래된, 그는 이 나라에서 태어난 이민 2세였다. 이 나라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결혼까지 일찌감치 한 그는 의류업을 하고 싶지 않아 했었다. 우리 가게에서 알바를 하며, 카메라와 사진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지식은 이미 습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유창한 언어가 더해진다면, 그로서는 해 볼 만한 사업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선 꽤 알려진 재력가여서, 아마 아들을 위해 투자를 결심하지 않았나 싶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별히 인수인계할 특별한 사항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가게를 무난히 넘겨줄 수 있었다. 그때가 1995년 가을. 4월이었다.


'걸’이의 안부는 수시로 확인은 하고 있었지만 혼자 고생하고 있는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민지’가 어차피 졸업은 해야만 하겠기에, 내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2007년 한여름 어느 날 저녁, ‘홍실’이가 죽었다. 개(犬) 17년. 개 나이 17년(15kg 이하) 이면 사람으로 치면 100살이 넘은 셈이니 참 오래도 살았다. 생후 1주일이나 되었을까? 고물고물 그리며 우리 앞에 나타 난지 17년 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대체로 좋아하는 축에 속하니 싫은들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1991년 겨울. 당시 우리 가족들은 막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고, 이민 생활에 적응키 위해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차, ‘홍실’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아이들에겐 정서적인 위로와 함께, 타국에서의 시름을 달래는데 큰 도움이 되었든 것이 사실이었다.


이후 우리들 곁에는 항상 ‘홍실’이가 있었고, 어느덧 반려견의 위치에서 가족으로 격상(?)된 듯, 그렇게 우리는 한 우리에 모인 진정한 가족으로 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 나가고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든가? 여차한 사정으로 인생의 여정을 다시 한국으로 돌렸을 때, 우리는 ‘홍실’이의 실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남길 것인지, 동반할 것인지를 놓고, 우리는 잠시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가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홍실’이가 우리 가족임을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출발 공항에서의 제반 절차와 예방접종 마친 후, 여객 석과 화물칸으로 갈라섰을 때, 우리를 쳐다보던 ‘홍실’이의 그때 그 눈망울이 참으로 슬퍼 보여,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있었다. 김포에 도착한 후 질병관리 관계로 3주간의 유치기간 동안에도, 우리는 수시 면회를 통해 ‘홍실’ 이를 보살피곤 했었고, 이후 우리와 함께 쭉 ‘서울’ 생활을 이어왔다.


생각하면 ‘홍실’이와의 에피소드도 많았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같이 뒹굴기를 17년. 그해 여름 ‘홍실’ 이를 그렇게 보내고, 낙엽이 떨어지던 가을이 깊은 어느 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첫 손자 ‘다미아노’를 선물로 받아 기뻐하고 있었다. 헤어지고, 또 만나고. ‘會者定離’가 이런 것이던가 싶다.


                                                                                         큰아이 ‘걸’ 이를 서울로 보낸 후, 우리는 한동안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가족이 떨어져 보기는 처음이기도 했지만, 막상 이 나라를 떠난다고 결정을 하고 나니, 모든 일상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고, 또 한 번의 큰 파도를 넘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특히 아내인 ‘소피아’의 상실감은 남달랐다. 저녁이 오면 ‘걸’이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걸’ 이와 제일 친했던 ‘홍실이’를 끌어안으며, 혼자 괴로워하기도 했었다. 이를 보고 있는 내 심정인들 편할 수가 없었지만, 이 모두는 가장인 내가 짊어져야 할 내 십자가임을 나는 잘 인식하고 있었다.

 

‘민지’를 보낼 때까지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나는 나 혼자만의 현상소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가게 물색에 나서게 된다. 마침 대로 길이 아닌 골목길, 작은 공간의 적당한 장소를 발견한 나는, 1년간의 짧은 기간의 임대계약을 맺고, ’Fuji’ 미니랍을 설치한 후 ‘포토랜드’란 이름의 현상소를 오픈하게 된다. 혼자 운영을 하는 만큼 모든 것이 더 조심스러웠고, 이제는 ‘소피아’의 도움이 절실할 때였다.


 대로변에서의 장사와 골목길의 장사와는 그 차이가 많았으며, 매출도 전과 같지 않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마당에 최선을 다하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개월. 해는 바뀌어, 우리는 1997년의 새해를 맞고 있었다.


이해에 한국은 간당간당하던 국가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보이며, 그해 11월 IMF 국가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민지’의 서울 ‘덕성여대’ 서반아어과, 입학이 확정된 것이 1월이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민지’를 서울로 보낸 때가 2월경, 서울의 오빠와 합류했다는 소식을 받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애들 둘을 다 보내 놓고 나니,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마치 삶의 모든 가치를 상실한 듯 멍한 세월을 넋 빠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집은 이미 처분을 하여, 작은 아파트 월세로 옮겼으나, 가게의 ‘미니랍’의 인수자가 나오지 않아 그냥 기다리고 있으며, 허울뿐인 영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급한데 급한 만큼 현실은 따라주지 않으니, 기도만을 드리며, 이곳에서의 마지막 애원을 하느님께 호소했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한 원주민 작자가 나섰고, 시가 보다 약간 싸게나마 우리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자산을 털어내고 있었다.


1997년 6월 우리는 ‘걸’이와 ‘민지’와 ‘IMF’등 모두가 기다리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친 영육을 위로나 하는 듯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그날, 초겨울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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