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 베드로 Dec 19. 2020

건강 보고서

나는 건강한가? 이 물음에 ‘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고 차멀미나  멀미를 하는 사람을, 건강이 좋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신체 상태를 건강과 직결시키기에는 약간의 괴리감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강의 기준 자체가 보는 사람의 시각과, 대상자의 현재 상태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의학적인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외형상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가지고 건강을 어림하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요즈음의 우리들은, 역설적으로 좀 더 가까운 시각에서 건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그만큼 건강은 우리와 직접적인 관심과 영향권 내에서 항상 존재하고 있다.

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불어 닥친 ‘웰빙’ 바람은 100세 시대를 구가하며, 우리들의 허황(?)된 불로(不老)의 꿈들을 잔뜩 부풀려 놓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삶의 질을 한껏 높여 오늘날의 윤택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은, 역시 건강이 그 첫째요 둘째요 셋째 일 것이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고 흔히들 이야기들은 하고 있지만, 요즈음의 돌아가는 현실은 꼭 그렇지마는 아닌 것 같아 씁쓰레하기도 하다.

그래도 건강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원초적인 욕망 그 자체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내는 몇 년 전부터 오른쪽  다리의 고통을 호소해  오고 있었다. 어떤 뚜렷하고 특별한 증상은 없는 듯한데, 새벽이  되면 정강이 밑 종아리와 발  뒤꿈치 까지가  아파오며 잠을 설치곤 했었다.

언뜻 하지정맥류가 의심이 되어 전문병원을 찾아 여러 가지의  검사를 받아 봤지만,  진단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본인은 한결같은 고통을  주장하고 있지만, 결과가 다르니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고,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정형외과 외 여러  병원을 다녀 봤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던지라, "죽을병도 아닌데, 그냥 지내보자"라는 아내의 자조 섞인 넋두리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생각 끝에 대학병원  혈관외과에 다시 한번 예약을 해놓고 그날을 기다렸다.


生 과 死 사이의 병(病) 노(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들이 밝혀지고 있으며, 그 결과로 우리들의 건강관리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의 노인들에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고통의 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기웃거리며, 오늘도 자신의 아픔을 호소해 보지만, 딱히 시원한 해법을 찾지 못한 실버들이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건강을 논하는 것은, 바로 이 病老에 관한 문제이며,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방점임이 틀림이 없다. ‘태어나면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인정하고 있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던 진나라 시황의 어리석음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이 났지만, 죽은 후  시신 냉동으로 보관되어 있으면서 먼 미래에 부활을 꿈꾸는 일부 해외 부유층들의 소식은, 불로와 불사에 대한 인간 욕망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건강관리는 본인의 의지나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조절 내지는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고, 늙었다고 해서 건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젊다고 해서 다 건강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질병이다. 건강하지 못한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틈새를 집요하게 노리고 있던 질병은, 방심과 부주의의 허점을 틈타 우리들의 건강한 세포에 침투한다. 그리고는 공생 내지는 우리를 파멸시키려 하면서 괴롭힌다.


아내는 정확하게 이십 년 전, 신장과 방광 사이 요로에 결석 제거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다. 이로 인해 신장 2개 중 1개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결석이 요로를 막아, 통과되지 못한 요에 잠긴 오른쪽 신장이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왼쪽 신장에게만 의지한 채 이제껏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남은 하나에 의지해야 하는 부담과 함께, 본인의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으며, 지금 까지의 삶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여정을 잘도 견디며 말이다.

 나는 이를 상기시키면서 현재의 오른쪽 다리와 그때의 오른쪽 신장을 생각하고는, 순간 아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장으로 인한 통증이라면 분명히 이것은 그 기능과 관계가 될 것이고, 남은 한 개의 신장을 생각하면, 보통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직결된 것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혈액검사, 초음파, 또 CT 촬영 등을 마치고 2주일 후, 우리는 담당 주치의와 마주 앉았다. 이미 그 의료기록은  주치의에게 전달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내심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는 정신적(Psychological)인 건강을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의학의 전문인아니지만,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가 여러 가지의 질병을 유발하는 요인중 하나임을  알고 있다. 아마 이를 부정하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파스칼은 그의 작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는 생각하면서, 또 이웃과 어울리면서 사회적인 관계로 얽히면서 살고 있는 조금은 특별한 동물의 집단이다.

그래서 생각이 요구되고, 절제와 인내가 요구된다. 여기서 발생되는 ‘스트레스’는, 나를 갉아먹는 아메바와 같이 정신세계를 넘어 육체적인 괴로움까지를 동반하며, 나를 압박한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 질병을 불러오고 급기야 나의 건강은 드디어 ‘red zone’에 이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내 통증의 원인은 아직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내의 남은 한 개의 신장은 이십 년이나 된 현재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다리의 통증은 앞으로 밝혀내면 될 일이고, 이때껏 남은 콩팥 1개의 유지를 위해, 이십 년을 숨죽이며 살아왔던 아내는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의 통증 따위는 잊어버린 채 신장의 건재함을 자축하며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다리의 통증은 처방해 준 약으로 대치되기도 했지만  아내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밝아져, 내가 보기에도 아주 좋아 보였다. 정신적인 해방감이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은퇴 후 2년, 나의 쉼 없는 백수생활은 오늘도 계속된다. 아니 죽을 때까지 나는 영원한 백수가 될 확률이 많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백수 대신 ‘웰다잉’을 꿈꾸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혹시라도 주위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잘 죽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 살아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고 잘 살기 위해서는, 건강관리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아내가 차려준  잡곡밥 한 보시기를 후딱 해치운 나는, 이내 커피 한잔과 귤 서너 개를 입에 까 넣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점심때는 어디 좋은 맛집에 가서 걸쭉하게 한 그릇 합시다!"            

                                                                                                                                                       2020.11. 19                                                                                                


작가의 이전글 그대들 있었음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