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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성 Jul 22. 2020

'소확행'의 부작용


 우울증이 멈출 기미가 안 보이던 시기,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위로의 말들을 찾아다녔었다. 핸드폰 스크린 속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설명으로 다양한 공감대를 만들었지만, 가장 많은 조언은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라는 것'이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는 '소확행'이라는 신조어는, 집 한 채 구하기란 하늘의 달 따기가 되어버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주면서 2018년 트렌드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나 또한 실현이 어려운 행복들을 좇던 현대 젊은이였으니, 따뜻한 햇살 한 줌에, 치킨 한 마리에 행복을 느끼고자 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당분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일어나서 햇살 한 번 맞으니 월세 독촉 문자가 날라오고, 집에 와서 치킨 한 마리 뜯으니 불합격 문자가 날라오는 것이 아닌가. 시련을 커버하려면 하루에 햇살 3시간은 쐬고, 치킨 15마리쯤은 뜯어야 할 판이었다.


SNS 보고 그렇게 외쳐대던 소확행 타령은 며칠 가지도 못 했고, 나는 두 가지의 결론을 냈다.


1. 소확행은 이미 어느 정도 수준의 행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효하다.

2.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확행은 '정신 승리'가 될 확률이 크다.


10의 시련을 1의 행복으로 극복하려니, 10번 괴롭히고 1번 잘 해준 군대 선임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 같았다. 그저 염세적인 관점 같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소소한 행복 찾아보기'라는 실천이 그리 장기적인 효과를 가지지 못 했기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과연 소확행은 부작용 없는 처방전인가?






소확행은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라는 명백한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소확행은 지친 현대인들에 손을 내밀어주는 위로의 개념일 수도, 행복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개념일 수도 있다. 다만 전자와 같이 잠깐의 위로 한마디 이상으로 소확행을 받아들이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후자와 같이 행복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소확행은 '거창하고 큰 꿈'을 '허황된 욕심'으로 해석해버리며 그것들을 포기하라는 관점으로 비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소확행은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며 심각한 부작용을 가지게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소소하고 확실한 방어'라는 새로운 처방전을 제시하고 싶다.


이 관점은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더 자주, 그리고 크게 체감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행복을 '영혼까지 끌어모아'도 체감되는 시련의 크기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잠깐 동안 상처를 덮을지는 몰라도 언젠가 드러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시련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쪽이 더 '확실하고 장기적인 처방'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요즘 나는 하루하루가 고요한 것을 느낄 때면, '왜 이리 평화롭지? 내 삶이 이럴 리가 없는데'라며 경계 태세를 갖춘다. 어차피 뒤통수 맞을 것을 알기에, 난데없이 맞기 전에 목에 힘을 주는 셈이다.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기에 앞서,

먼저 '덜 아파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는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 교수는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일상'이라 하면서,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행복을 강조해 현대인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끔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근사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다만 그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코딱지 같은 행복으로 하루는 버틸지언정 10년을 버틸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행복하지 않은 것이 불안해서 '행복하지도 않은 행복'을 찾아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오히려 그것이 불행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쳐있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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