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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성 Jul 16. 2020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알고 보니 모두가 우물 안이었다

 경영학을 전공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뜬금없이 요리사의 길을 걷겠노라 선언하며 이후 4년 정도의 꽤 긴 시간을 요리에 투자했다. 이미 전혀 다른 전공을 가지고 대학교에 발을 들였기에 실패했을 때의 뒷감당이 두려웠지만, 나는 무얼 할 때마다 '뭐라도 남겠지' 하는 습관적인 안일함을 가지고 있던 덕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요리하는 것은 분명 즐거웠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업으로 삼으니 즐겁지 않은 부분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지나치게 많았다는 것. 개중에는 어릴 때부터 조리학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들, 부모님으로부터 재능을 받은 '요리사 수저'를 문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의 근사한 요리와 내 요리를 비교하는 것은 항상 좌절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도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 해서 도전했던 건데, 요리란 것을 깊게 알면 알수록 내 요리는 계속해서 초라해지는 것이었다. 


특히 나는 프렌치 요리를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맛은 물론이요 재료 속성 간의 조화나 색채, 심지어 한 접시가 담고 있는 의미까지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중 요리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이 요리는 바닷속 헤엄치는 물고기를 표현했네, 목장에서 뛰어노는 소를 표현했네, 지붕 위의 닭을 표현했네 등. 나는 혼자서 속으로 '죽은 것들 잔뜩 담아놓고 다들 저렇게 잘들 표현하네.' 하며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저렇게 하는 걸 보니, 저게 요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인갑다 했다. 아,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지만 '나도 와 닿지 않는 표현과 맛을 어떻게 남들한테 뻔뻔하게 설명할까'에 대한 긴 고민이 필요했다. 많은 요리 대회들을 준비하며 많은 흉내도 내보고, 신박한 의미 부여도 연습해봤지만 결국 내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별안간 요리가 재미가 없어졌었다. 그래서 그냥 인정 못 받더라도 재미있는 요리를 하기로 했다.




우물 안에서 빛을 냈다.


요리를 시작한 후 3년째 되던 해, 대규모의 요리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소속만 가지고 있으면 출전이 가능하던 터라 당시 군인이었던 나는 부대 소속을 명분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출전 요리를 오랜 시간 연구하고, 레시피가 정립된 후에는 하루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 요리를 만들었다. 대회 전 마지막 주에는 하루에 10시간을 똑같은 요리를 만들며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없었다. 요리로 유명한 웬만한 대학교 호텔조리학과 학생들이 다 나오는 대회였고, 그에 반해 나는 조리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정석'을 배우지 못한 초짜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요리사들만의 경건한 행사의 불청객이 된 듯했다.


대회 당일, 손톱을 물어뜯으며 대회장을 찾았을 때 대회장은 가슴팍에 태극기가 그려진 멋진 조리복을 입고 있는 수많은 조리학과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태극기는커녕 내 이름 석 자도 없는 내 조리복을 감추고 싶었다. 이미 시작도 전에 주눅이 들어있던 나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전날 만들어 젤라틴으로 아스픽 처리를 시킨 DP(전시 부문)용 요리를 점검하고, 시연 부문 레시피와 동선을 가다듬으며 마지막 채비를 했다.


어느덧 대회가 시작되었고, 딱 보기에도 근사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DP 테이블에 전시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정석'의 향연이었다. 조리 서적에서 본 듯한 보기 좋은 색감과 구도,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긴 요리 제목까지. 그리고 한편에는 검은 양처럼 초라하게 전시되어 있는 나의 요리가 있었다. 다채로운 테이블 위에서 혼자 흑백 효과를 뒤집어쓴 듯했다. 


전시 심사가 끝나고, 터질듯한 심장과 함께 한 요리 시연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 마침내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그냥 집에 갈까 하다가 끝은 보고 가자 싶어 빈자리에 앉았다. 


무슨 부문 동상, 누구. 무슨 부문 은상, 누구. 끝없이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누구를 위한 건지도 모르는 기계적인 박수를 치고 있었다.



 "금상 시상하겠습니다. ···○○부대. 축하합니다."



부대... 부대? 그럼 난데?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서둘러 단상 위로 올라갔고, 끝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심지어 시연 부문에서 은상까지 받게 되어 두 개의 메달을 걸게 되었다. 그 어리둥절함은 대회가 끝난 이후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우물을 즐기기로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요리를 그만두게 된 이후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무엇 하나 정석적이지 못 했던 나에게 상을 준 대회 측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제는 조금 진부해지기도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에서 뒤늦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통적인 방법으로 공부하지 못 했던 나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 요리에 대한 옳고 그름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저 스스로 느끼는 만족과 불만족이 있었을 뿐. 그래서 내 요리는 전공자들의 요리 사이 '미운 오리 새끼'였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백조로 보였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제는 글쓰기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나는, 출간된 책과 많은 브런치 작가들의 멋진 글들을 보며 감명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랑 주제는 비슷한데 급이 다르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와 같이. 문예와 전혀 관련도 없는 전공을 했을뿐더러 어릴 때부터 책도 멀리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요리라는 분야에서 한 번 부딪혀보니, 벌써 두려워할 필요는 없음을 느꼈다. 누군들 우물 밖에 있으랴. 각자의 우물 속에서 조용히 성장할 뿐인 것이다. 


나는 요리할 때의 나를 회상하며, 내가 처한 곳이 아닌 나 자신 자체에 더 집중하고 싶어졌다.


이제 나의 목표는 멋지고 근사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과 같이 서툴기만 한 글을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것이다.




+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정말 '뭐라도 남았다'는 안도감은 덤으로 얻었다. 

덕분에 지금도 그때처럼 '뭐라도 남겠지' 하며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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