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많이 할수록 높은 시험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10살 먹은 초등학생도 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학생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100점을 맞는 학생부터 10점을 받는 학생까지 골고루 나눠진다. 이때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은 대개 '게으른 학생'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특히 대한민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반화 현상이다. 학생의 본질을 학업으로 마음대로 정의하고는, 그 울타리 안에서 학생들의 삶을 설계하고 평가한다. 학업 성취도만이 유일한 도태 압력(Selection Pressure)이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거부감을 느끼고 주저앉은 학생들은 도태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게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학생'과 '게으른 학생'이 분류된다.
그러나 박지성이 야구를 하기 싫어한다고 해서, 박찬호가 축구를 하기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의지박약 선고를 내릴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누군가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회에서는 잘못된 삿대질이 오가고 있다.
그 삿대질은 결국 '특별한 재능이 없으면 공부해라 / 아무 곳이나 취업해라'와 같은 선동적인 말로 귀결되는데, 이는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전해진다. 이 말을 은연중에, 혹은 직접 들어오며 살아온 한국 사람들은 당연히 시도와 도전에 방어적일 수밖에 없고, 억지로 하는 공부와 직무를 버티려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선천적인 재능'이 없으면 '후천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알고리즘은 오류가 많다. 사실 이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노력이란 '공부나 열심히 해'와 같이 '맹목적인 노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잖이 부끄러운 풍토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공무원 시험의 무의미한 역대급 경쟁률을 만들고, 극단적으로는 사회적 기울기(Social Gradient)를 증대시킨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면 높은 성적을 받고, 부모님의 칭찬과 친구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동기가 부족했던 것뿐이다. 반대로 전교 1등은 그에 대한 큰 동기를 얻는 데에 성공한 학생일 뿐인 것. 그러나 우리는 그저 게으른 학생으로 치부되어 회초리를 맞곤 했다.
즉, 우리는 재능과 노력이라는 두 가지의 옵션만을 놓고 삶이 결정되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고려해야 할 수많은 종류의 내·외부 환경이 존재하는 데도 말이다.
분명 알고리즘은 조금 더 복잡해질 필요가 있다. 제조업 위주의 과거와는 다르게 맹목적인 노력과 성실은 지양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A이면 B해라'가 아니라, 'A부터 Z까지 고려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는 현대적인 사회 풍토를 정립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각자 자신이 있어야 할 땅에 서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