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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성 Aug 27. 2020

N포 세대는 눈이 높고
노력이 부족한가?

"노력 트라우마"

한국의 'N포 세대', 영국의 'Generation Pause'.


두 단어는 내 집 마련이나 결혼을 비롯한 중대한 진로와 꿈들을 포기하고 미루게 된 청년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 일자리와 부동산에 대한 문제가 거듭해서 가중됨에 따라 이것은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N포 세대'라는 단어는 이제 누구나 들어봤을 정도로 지금의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


이 단어들은 처음 출현했을 당시 청년들의 고민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시사하며 그것들을 '엄살'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부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듯, 시간이 지나고 그러한 단어들이 남발됨에 따라 그 심각성의 크기가 퇴행하고 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그러한 신조어들이 '나태의 합리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는 몇 가지 측면에서 그 변질을 비춰보며 'N포 세대는 정말 눈이 높고 노력이 부족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의식주(衣食住)'의 변화


수렵 시대부터 현대까지, 의식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요소이다. 인간이라면 적어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불과 60여 년 전의 전쟁 이후 급속한 발전을 지나온 우리나라는 의식주의 충족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그러나 여기서 일컫는 의식주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요소이다. 50년 전의 절대적인 빈곤과 현대의 상대적인 빈곤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각 시대 속에서 의식주가 가지는 의미 또한 달라야 한다.


생리적 욕구에 대한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과거의 의식주와는 달리, 현대의 의식주는 사회적 욕구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배를 채웠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배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웠느냐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의(衣)와 주(住)는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논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나는 X 세대와 Y/Z 세대의 갈등이 이러한 의식주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의식주의 충족에 있어서, 어디부터가 하한선이며 어디까지가 사치선인가? 그 선은 분명하지도 않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세대도 그 선을 그을 자격은 없다는 것이다.




'눈을 낮추는 것'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구분선을 제시하며 청년들의 기본적인 가치 추구를 욕심으로 치부한다. 이 지점에서 '꼰대'라는 단어가 나타난 것 또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때는~'이라고 입을 떼는 순간 대화의 배경이 7080 시대로 바뀌어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자그마치 20~40년의 시간을 돌아간 시점에서 현재를 논하니, 청년들이 느끼는 거부감과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눈을 낮추면 된다'는 말이다. '나는 그 정도에 만족했었는데', '나는 그런 건 상상도 못 해봤는데'와 같은 말을 그 논거로 삼곤 한다.


그러나 눈을 낮춘다는 것은 그리 단순한 옵션이 아니다. 목표로 했던 중견기업이 아닌 집 앞의 중소기업에 들어간다는 것이 낮은 급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의 해결책은 되겠지만, 이것은 성공적인 이직이나 결혼, 출산 등과 같은 장래 계획을 감히 넘볼 수 없는 근시안적인 해결책이다. 차후에 높은 확률로 느껴야 할 패배감과 열등감은 누가 보장해주겠는가? 맹목적으로 눈을 낮추라고만 조언하던 사람들은 이미 '나 몰라라' 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 성장은 더뎌지고, 경쟁은 세계적으로 심화되며, 그 와중에 변화는 점점 더 가속되고 있는 지금, 눈을 낮춰서 무엇이든 해보고 보라는 조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오히려 청년들에게는 포기를 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노력 트라우마


더불어 현 시대에서는 예전과 비교했을 때 노력의 '효율'과 '방법'도 현저히 다르다. 즉, 노력이라는 단어 또한 시대적으로 통용될 수 없는 개념이 되었다. 그러므로 '노력이 부족하다', '만족을 한다'와 같은 말로 청년 세대의 고충을 깎아내리는 것 역시 올바른 비판이 없다.


나는 가볍게 지나가는 말로 여겨지는 그러한 비수와 같은 말들이, 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노력 트라우마'의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투입에 따른 산출이 보장되지도 않고, 심지어 그 노력 자체도 깎아내려지기 십상인 지금의 청년들은,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주저앉을 정도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며, 자책하지 않으며, 내가 실패했을 때 쳐다봐주지도 않을 어른들의 무책임한 조언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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