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Have No 'Hatred License'.
가장 고달픈 괴로움 중 하나는 인간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으로부터 미움받기 전에 재빨리 먼저 미워하려 한다. 그편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그토록 미워했을까. 무엇이 그리 미웠을까. 왜 그리 미웠을까. 그에게도 내가 쉽게 풀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저마다의 수수께끼 같은 사연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보다 똑똑하지 못해 그 수수께끼를 모두 풀 수가 없다. 그의 사연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의 행동의 이유에 대한 확언을 듣기 전까지 우리는 판단을 저만치에 미뤄두어야 한다.
현명한 삶의 문을 여는 만능 열쇠 두 가지가 있다. '이 또한 지나갈 것', '다 이유가 있을 것'. 열쇠 꾸러미도 필요 없다. 이 두 가지만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한 영양가 부족한 고민 거리들을 잠시나마 집어넣을 수 있다. 오늘 저녁에 먹을 쌀 한 톨 걱정하기에도 바쁜데, 타인의 행동에 대한 섣부른 판단부터 증오라는 감정까지 꺼내드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기에는 우리 삶이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그 증오의 유일한 부산물인 나의 스트레스일지도. 바닷물이 말라 반짝이는 소금만 남듯, 구태여 남을 미워해봐야 시간 조금 지나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참 빨리도 깨닫는다. 조금만 고개를 뒤로 돌려 여지껏 지나온 미움의 역사를 살펴 보아라.
이 이야기는 미움이라는 감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원망, 서운함, 배신감, 실망감, 모두 남이 안겨주는 감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결코 수동적인 감정들이 아니다. 오히려 능동적이다. 상대방이 원인을 제공한들 내가 대수롭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소에는 잘 쓰지도 못하는 내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꺼내고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심호흡 한 번에 살인을 면하는데, 인간 관계의 자그마한 측면만을 맛보고 등을 돌리는 것은 나를 어리석은 존재로 깎아내릴 수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미움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도. 의지와 노력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 인간 관계라는 것쯤은 각자 수십 년의 인생 경력을 통해 체득했다. 나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잠시 실수한 것 뿐인데, 그들은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등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일까. 우리는 가슴에 꽂힌 화살을 빼내 다른 누군가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을 것이다. 그 화살을 맞은 누군가는 다시 그럴 테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잠시 실수한 것 뿐인데.
서로에 대한 미움 하나 없는 유토피아 같은 것은 없지만 미움에도 미숙함이 있고 성숙함이 있다. 싸움에도 미숙함이 있고 성숙함이 있다. 당장 섣불리 누군가를 미워한 것은 가까운 나중 돌아봤을 때 부끄러울 수 있다. 5살 민식이가 친구 영숙이를 미워하는 것을 우리가 옆에서 본다면 대수로울까? 아니, 오히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훈훈한 미소가 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5살 민식이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근엄하고 진지하게 영숙이를 미워한다. 다만 6살이 된 민식이는 영숙이와 다시 손을 잡고 있겠지. 우리는 민식이가 아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과 2로 시작하는 어른이다. 성숙한 감정을 가진 우리는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할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