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차피'다.
올해 27살이다. 결코 길지는 않지만 그리 짧지만도 않은 시간을 지나쳐 왔다. 더군다나 내 또래 나이에 비하면 유난히 요동이 많은 세월을 보냈다. 만성적으로 달고 다니는 우울증과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갖가지 태연한 표정과 자세, 그러나 기어이 홀로 있을 때 드러나고야 마는 우울한 선택과 결과물. 피할 수 없었기에 삶은 복잡했다. 원하는 것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기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고달픈 환경이었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 없이 설명될 수 없는 나의 30년 가까운 삶에서 얻은 한 가지 결론이 있다.
삶에는 계획이 꽤나 필요 없다는 것.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초미세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미세한 계획표를 자랑한다(적어도 30분 단위로는 시간을 꾸며내니). 치밀함을 추구하는 내 성격 덕이었겠지. 내 삶도 그러하길 바랬다. 오후 3시에 바닷가를 갔으면 오후 4시에는 호텔에 체크인하고, 조금 쉬다가 오후 6시에 호텔 앞 시장에서 전통 국밥을 목에 들이부으며 차가워진 몸을 진정시키고. 그러나 삶의 계획표는 생각보다 방해하는 것들이 많았다. 바닷가를 걸어보자니 비가 오고, 호텔로 가자니 차가 끊임없이 막히고, 저녁을 먹기 위해 겨우 나오니 계획한 국밥 집은 폐업하기도 했다.
겨우 깨달았다. 아, 애초에 계획을 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속도는 차치하고 방향이라도 계획대로였으면 좋았겠건만. 여기 치여 동쪽으로 가고 저기 치여 서쪽으로 가다 보니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굳이 비 폭풍이 쏟아지지 않더라도 찰나의 소나기를 피한답시고 예상치 못한 곳에 서있기도 했다. 삶이란 실로 그랬다.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자 안달이 난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처음엔 그 원망의 불똥을 신에게 튀겨보기도, 가족에게 튀겨보기도, 나 자신에게 튀겨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 어리석었다. 실은 누구보다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는 존재들에게 원망을 나누다니.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원래 도착지보다 더 좋은 곳에 자리했을 때도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처마 밑을 서성이다가 귀인을 만나기도 하고. 삶이란 생각한 대로 가지 않는다는 단호한 말은 어찌 보면 괴롭기도, 희망차기도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계획을 갖추지 않고, 내가 27년 동안 자연스럽게 일궈낸 물결에 몸을 맡기기만 해도 되겠다, 싶었다. 좋은 곳을 찾으리라 노력한다고 좋은 곳에만 내가 있던가. 나쁜 곳을 피하리라 노력한다고 나쁜 곳을 쉽사리 지나치던가.
그렇다고 내 운명이 어딘가에 적혀있다는 사주와 무당에 복비를 바칠 의향은 없다. 어쩌면 내 미래를 누군가 정확히 알려준다고 해도, 그 사실을 앎으로써 결과가 바뀔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저 흘려주는 대로. 오늘과 내일의 물결이 다를지언정 수긍하기로 했다. 그게 내 삶의 유일한 마스터플랜이다.
인생은 한마디로 '어차피'다. 어차피 되고 어차피 안 된다. 그러므로 할까, 말까에 의미도 없는 긴 고민에 옥죄일 필요가 없다. 행한다고 후회 안 하는 것 아니고, 포기한다고 반드시 후회하는 것 아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포기 옹호론자'다.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말이라고? 전혀 아니다. 포기는 또 다른 시작의 출발점이므로. 그 새로운 출발점에 선 내가 포기하지 않은 나보다 더 잘될 것이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온갖 완벽한 나노 단위의 인생 계획표를 짰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 계획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거니와, 그 계획을 지키는 게 더 나을지, 계획에 실패하는 게 더 나을지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계획이 없음으로써 실망과 기대가 없다. 실망과 기대가 없음으로써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포기하며 능동적으로 시작하고 끝마칠 수 있다. 나의 여생이 얼마의 시간일지 모르겠으나 그 남은 시간의 모토를 나는 새로 정했다.
계획이 없는 게 내 계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