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성 Jul 06. 2020

착하게만 살면 된다면서

"권선징악의 함정"

 나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선생님을 포함한 주위 어른들은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언젠가 빛을 본다'는, 근거는 없지만 왠지 맞는 것 같은 이 말을 나에게 건네곤 했다. 타고난 성격도 꽤 있지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음을 일찍이 깨달은 나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착하지도 않으면 누구도 나를 쳐다봐주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행동들은 부수적인 잔여물을 낳는다. 나의 경우는 불필요한 배려와 희생, 그에 따른 억울함과 회의감 따위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것들을 밖으로 표출했다가는 쌓아 올린 공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들 하나하나는 크기가 작아서 심기를 톡 건드리는 정도뿐이지만, 결국 쌓이고 쌓여 태산이 된다.  




내가 10살 남짓의 어린아이였을 때, 1년을 기다린 생일이 찾아와 부모님께서 선물을 사주신다 하면 집 근처의 커다란 장난감 가게에 가곤 했다. 어느 생일날 역시,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그 가게를 찾았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반짝거리는 장난감들을 토끼 같은 눈에 한 번씩 담고서는, 갖고 싶었던 3만 원짜리 로봇 장난감을 애써 외면하고 5천 원짜리 곤충 장난감을 집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 모두 담기는 소박한 장난감을 쥐고, 나는 엄마의 옷소매를 잡으며 이제 집에 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진성아, 몇 개 더 골라봐." 


 "이거면 됐어. 이것도 좋아." 


그때의 나는 세상 물정이라곤 알지도, 알 수도 없는 어린아이였는데,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계산을 할 때까지 나는 보란 듯이 그 3만 원짜리 로봇 장난감에 일부러 계속 눈을 맞췄다. 아쉬움이 남아서도 아니고, 엄마가 그 장난감을 사주길 바래서도 아니었다. '나도 비싼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는 아이지만 나는 집안 사정을 헤아리는 착한 아이라서 싼 거로 골랐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래서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살면서 갖고 싶은 것을 한 번도 맘 편히 사본 적이 없는 성인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점점 어른이 되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됨에 따라 나는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로봇 장난감을 포기했으며, 때때로는 곤충 장난감마저 포기하기도 했다. 이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분명 착하게 살면 된다고 했다. 갖고 싶은 거 좀 포기해도, 먹고 싶은 거 좀 못 먹어도, 억지로 사과 좀 해도, 그래서 조금 미련해 보여도 상관하지 않았다.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너는 잘 될 수밖에 없다'며 어깨를 두드려줬고, 스스로도 뿌린 만큼 거둘 수 있을 것이란 확신에 차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뿌린 건 대부분 씨앗이 아니라 돌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나는 결국, 겉으로는 가난과 싸워야 했고, 속으로는 극심한 우울증과 싸워야 했다. 피어나지도 않을 새싹을 기다리며 열심히 농사만 짓다가 허리만 망가진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권선징악'이란 말의 뜻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뜻풀이를 곱씹어 보고 나서, 나는 아차 싶었다.  



"아, 나쁜 사람이 벌 받는 건 맞는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었구나."  



나쁜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벌 받았다'고 하지, 착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상 받았다'고는 잘 안 한다. 그건 그냥 본인이 잘한 거지. 글쎄, 공자가 살아 있던 몇천 년 전은 상을 주기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21세기의 나는 나름 착한 짓을 나쁜 짓보다 수백 배는 더 많이 한 것 같은데, 돌이켜보니 벌만 온종일 받아왔더라. 


그렇기에 조금은 뻔뻔하고 조금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러기가 도통 쉽지가 않다. 하지만 여기, '선'이라는 권장 사항을 지나치게 많이 지키며 살아온 내가 얻은 한 가지 깨달음이 있다. 


뻔뻔함도, 이기심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  



경제학 용어 중에, 손실회피성(Loss Aversion)이란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은 이익보다는 손해를 더 크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의미가 클지도 모른다. 배려를 받는 상대방에게뿐만 아니라 배려를 하는 나 자신에게도 말이다.

 

배려심은 남을 위하는 마음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기심은 나를 위한 마음이다. 다시 말해 배려심은 나 자신에 대한 이기심이요, 이기심은 나 자신에 대한 배려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가슴 한편에 품어놓아야 한다. 


'착한 사람 되기'는 별 볼 일 없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나는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임머신은 너를 죽일지도 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