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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Apr 16. 2022

벌써 퇴근한다고?

칼퇴가 아니라 '정시퇴근' 입니다.

인간에게는 언어 말고도 다른 여려가지 표현 수단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표정이나 제스쳐인데, 이것을 잘 잡아내고 파악하는 사람이 보통 '눈치가 좋다' 라고 평가받는다. 아마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생존방식 일테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 무언의 신호를 재빠르게 포착해내야 생존할 수 있다. 이 재주는 타고나기도 하지만, 우리 같은 직장인들은 후천적으로 학습할 수도 있다. 아니, 학습해야만 한다. 특히나 이런 분위기의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더욱.



오전 7:45

오늘 따라 엘리베이터가 붐빈다. 17층에 내렸다. 이제 날씨가 좀 더워서 땀이 조금 난다.

사무실로 들어와 일단 팀장 자리로 간다.

먼저 온 팀원들이 팀장 석 앞에 줄을 서 있다. 왜냐면, 팀장에게 아침 인사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조금 일찍 출근한 사람들이 많다. 4명이 내 앞에 차례를 기다리고 줄을 서 있다.

드디어 내 차례,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팀장은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 답은 없다. 심기가 불편한가보다. 오늘은 조심해야지. 일보다는 팀장 컨디션 체크가 우선이다.


오후 5:50

일을 마무리하고, 팀장 자리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얼굴 표정을 본다. 괜찮은건지 모르겠다. 저러다가 또 폭발하기도 하니까 안심하면 안된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출근 인사 때는 미동도 없던 팀장이 퇴근 인사때는 얼굴을 쳐다본다.

내 얼굴을 약 2초간 쳐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본다. 2초.

다시 내 얼굴을 보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본다.

(우리는 그걸 '도리도리'라고 부른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한다.


이건 마치 침묵의 게임.


나는 생존을 위해 팀장의 도리도리 제스처 속 숨겨진 의미를 재빨리 파악한다.(진화는 이렇게 좋은거다.)

변명을 시작한다.

“오늘 아내가 생일이라,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팀장 심기가 안 좋은 듯 하니, 여기에 이 말을 덧붙인다.

“먼저 퇴근해서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지시한 기획안은 작성했어?"

"네, 마무리해서 팀장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팀장은 크게 한숨을 쉬고 "들어가"라고 한다.

다행이다. 기분이 안좋은 날에는 곧바로 업무 질책 및 근태 충고가 1시간에 걸쳐 이어진다.

팀장이 혹여 마음을 바꿀까봐, 서둘러 움직여 사무실을 떠난다.



출처 : 연합뉴스


이미 정시 퇴근(5시)에서 50분을 넘긴 상황인데, 나는 무엇을 죄송하다고 말했던 걸까?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걸까?


내 얼굴을 보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다시 내 얼굴을 보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나는 이 행동을 '지금 시간이 몇시인데 벌써 퇴근하는거야? 제정신이야?' 라는 뜻으로 읽었다.

물론, 내 눈치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 틀릴 수도 있다. 아, 혹시 '감히 팀원이 팀장보다 먼저 퇴근해?' 라는 뜻일수도 있겠다.

저 행동이 팀원들에게 가져올 압박과 스트레스는 과연 생각해본 적 있을까?


'일을 제대로 해 놓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러는거 아니냐? 일만 제대로 해봐라 그럴리가 있냐?'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문제를 온전히 팀원들에게 떠넘기는 태도다.

혹시 일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 리더가 아래와 같은 것들을 고민해봐야지.

퇴근시간을 가지고 눈치를 주면 쓰나.


1. 정해진 하루 일과 동안 처리하지 못하는 양의 일을 할당한 문제
    (일의 복잡/영향도 파악이 부족하진 않았는지? 팀원 개개인 역량 파악은 해본적 있는지?)

2. 일을 처리할 수 없었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문제
    (다른 운영성 업무가 긴급히 들어온 건 아닌지? 네트워크,방화벽,디바이스 등 팀원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업무 환경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3. 번아웃이 오거나, 스트레스 과다로 처리 능력 저하가 온 건 아닌지 파악하지 못한 문제
    (최근 팀원과 진지한 면담은 해본적 있는지? 회식자리에서 혼자 떠든건 면담이라고 부르지 말자.)

4. 리더의 욕심으로 과다한 업무를 팀에 끌고온 문제

    (팀 전체의 리소스를 고려하지 않은 업무를 받아오진 않았는지, 팀 업무 본연의 바운더리를 고민해본 적은 있는지?)

5. 팀원 동기부여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문제

    (좋은 팀은 시키지 않아도 팀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리더로서 비전을 보여준 적 있는지?)

6. 1~5번 문제가 아니더라도, 팀원이 팀장 눈치를 보며 벌벌떠는 문화를 만들어놓은 문제

    (이게 제일 심각하다. 팀 문화에 대한 고민은 해 본적 있는지?)


'아니, 리더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챙겨야 하나? 꼭 능력없는 것들이 리더 탓 하더라. 역량있는 팀원이라면 알아서 자기들이 잘 해야지, 일일이 챙겨줘야 하나? 너희 돈받고 일하는 프로 아냐?'

돈 받고 일하는 프로선수들은 헬스 체크부터, 심리 상담까지 오히려 더 철저하게 관리받는다. 그리고 그런거 챙기라고 리더가 필요한거다. (리더는 팀원 위에 군림하며,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고 겁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출처 : 잡코리아


예전 회사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예 슬로건을 걸었다.

'직원 퇴근 때, 퇴근 관련 농담도 하지 않기(오늘 약속있나봐? 벌써 퇴근해? 등)'

'퇴근하는 직원에게 웃으며 인사하기'

'조직장부터 먼저 퇴근하기'

'퇴근 시간 이후에는 절대 업무연락 하지않기'

뭐 이런 내용이었다. 물론 100%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각심을 주는데 큰 몫을 했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통한 IT 플랫폼 기업으로의 전환'을 회사의 기치로 내걸었던게 불과 얼마 전이다.

이런 문화에서 어떻게 개발중심의 문화가 싹을 틔울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줄을 서서 출근 인사를 하고, 퇴근하며 팀장의 무언의 제스쳐를 읽어 '죄송합니다'를 남발해야하는 회사에서는 그 무엇도 트랜스포메이션 할 수 없다.


일화가 하나 더 생각났다.

소위 말하는 '크런치 모드'에 들어가 <전 직원 22시 퇴근> 이라는 명령이 하달됐었다. (당연히 추가근무수당 따위는 없다)

그래서 저녁 10시에 퇴근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거기서 팀장을 만났다.

"어디가냐?"

"퇴근합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벌써?"

"저희 10시 퇴근.. 이라고 하셔서..."

"넌 10시에 퇴근하란다고 정말 10시에 가냐? 눈치껏 10시 30분 정도에 가야할 꺼 아냐!"


우리 팀은 이렇게 출근하고, 또 퇴근한다.

오늘도 팀장의 도리도리를 보겠지.

혹시, 벽에 걸린 시계를 몰래 없애면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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