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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Apr 24. 2022

그냥 가벼운 티타임인 줄 알았는데

온 주변이 배울 곳 투성이구나.

이런 느낌의 카페에서라면 하루 종일 책읽고 글만 쓸 수 있겠다. (출처 : https://steemit.com/kr/@aaronhong/4-1)


IT기업 대표분과 티타임을 가졌다. 

누구나 들으면 알 만한 스타트업. 나도 기사를 통해 접했었고, 관심이 있어 응하게 되었다. 업계 관련 소식과 일하는 방식, 오픈된 포지션 등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는 소문답게 스마트하고, 친절하고 부드럽지만 숨겨진 강함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권위의식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합리적인 느낌. 이 정도 기업을 용기있게 일궈낼 정도면 당연한 성품이었다. 

당연히 예의도 갖춘 분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마음이 편했다. (내가 요새 무례한 사람과 많이 접했던 탓인지, 상대방이 예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했다.) 나도, 그도 영어 닉네임을 사용하지만, 편의상 E로 부르기로 하자. 티타임에는 CTO분(편의상 T로 부르기로 하자)도 동석하셔서 의미있는 질문과 대답을 이어갈 수 있는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가벼운 티타임인줄 알았는데, 대화 중 인상 깊었던 장면에서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렇지, 이런게 바로 '스타트업' 이지> 라는 기분.(사실상 스타트업은 넘어간지 한참 되어 자리를 잡은 기업이지만, 이건 '스피릿'에 대한 이야기다.) 레거시 등 기술부채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내린 E의 과감한 결단에 대한 대화였다. 중심 내용을 조금 옮겨본다.


나 : "요새는 어떤 부분을 고민하고 계세요?"

E : "신규 비즈니스는 일단 멈춘지 몇 개월 됐습니다. 현 상태만 유지하는 수준이에요."

나 : "?? 왜요? 한참 성장해야 할 시기 아닌가요?"

E : "T와 깊게 논의한 결과였어요. 저희 코드 때문에 더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 그러니까 기술 부채 부분이 우려가 되었어요. 1년간 오롯이 기술 부채 해결에만 리소스를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나 : "그래도 되는거에요? 사업 부분에서 말이 많았을텐데요?"

E : "그렇죠, 사업쪽에서 반발이 심했는데, 제가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요새는 코드 고도화 이런 이야기가 제일 무섭습니다 ㅎㅎㅎ. 물론 저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의 논의와 토론을 거쳤구요. 저는 T의 판단을 믿습니다. 제 결정이 맞는거죠 T?"

T : "E가 큰 결정내려줬죠. 이 1년 투자로, 향후 수십년간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다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위 내용 말고도 앞뒤로 더 이야기가 있지만, 일단 주요 맥락은 위와 같았다.)


코드 개선에 1년을 투자했다고 했다. 신규 비즈니스는 모두 일단 멈춘 채. 

이게 말이 쉽지, 한참 성장해야 하는 스타트업이 기술 부채 해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 아마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혹은 스타트업이었기에 가능한 결정이라고 봐야 할까)


'코드 고도화 이런 이야기가 제일 무서워요~ ㅎㅎ' 라며 너스레를 떠셨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그 결정에 얼마나 많은 고뇌의 시간이 녹아있을지를. 


상상해봤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조직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레거시 코드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러다 언제 대형 장애가 터질지도 몰라요. 당분간 외부 요청 및 신규 개발건은 모두 멈추고, 기술부채 해결에 1년간 집중하겠습니다."

과연 상위 의사결정권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믿고 맡겨줄까?

1년을 투자해도 아무런 티도 안나는 내부 로직 개선을?

갑자기 씁쓸하고 우울하다.


물론, 대기업이라는 특성이 있다. 스타트업 규모의 회사와는 다르겠지. 하지만 이런 과감한 결정 사례는 쿠팡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이건 전해들은 이야기로 사실관계 확인은 되지 않았다.) 쿠팡의 한 도메인이 내부 레거시 로직 문제가 너무 심각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큰 문제가 터질 것이라는 기술리더들의 우려가 컸다. 그게 장애가 되었든, 확장이 되었든. 리더는 과감하게 상위에 관련 보고를 했고, 해당 도메인은 몇 개월간 외부요청 등은 전부 셧다운 한 채, 기술 부채 해결에 리소스를 쏟아부을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에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무척 부러웠던 마음이 기억에 남았다.


쿠팡도 했었다.(고 전해들었다.) 쿠팡의 특징은? 내가 느끼기로는 'IT기업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IT기업이라면 이런 결정을 과감히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소프트웨어로 동작하고 수익을 내는 회사라면 그럴 수 있어야 한다.


회사 생활을 오래하다보니,

A의 결정이 그냥 대단한 수준이 아니라,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신규 비지니스를 멈추고 기술문제를 먼저 해결하자고 과감히 제안하는 문화.

그 말도 안되는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논의와 토론을 거치는 의사결정 과정.

꼬치꼬치 캐묻고 일일이 딴지걸지 않고, 믿고 권한을 위임하는 리더십.

멋지다 못해, 위대하게까지 보였다.


모든 회사가 이런 결정을 할 수는 없다. 맞다. 다들 각자의 사정과 어려움이 있으니. 시시각각 급변하는 경쟁구도에서 비즈니스를 멈추는 엄청난 결정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아주 작게나마 이런 느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어떨까? 100%는 아니지만, 전체 리소스의 20% 혹은 30% 정도라도 레거시 해결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팀원들은 느낄 것이다. 그리고 감동받을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곳이 정말 IT회사가 되어가는구나. 회사는 조금씩 노력하고 바꿔나가고 있구나. 나도 뭔가 해 볼 수 있겠구나. 그런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문화'는 시작되는게 아닐까.


물론 그런 과감한 도전에서 리더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도메인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팀원의 공감대를 얻고, 상부를 설득하고 동력을 얻어내는 것 등 은 어디까지나 리더의 역할이니까. 이건 그냥 단순히 월급쟁이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위에 이야기한 'E' 나 'T' 처럼 개인 스스로 소명의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도전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란 참 어렵고 고된 자리다. 


이번 티타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온 주변이 배울 곳 투성이구나. 이렇게 하루하루 깨닫고 또 성장한다. 나도 언젠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책임질테니, 우리 1년간 코드에만 집중해 봅시다. 같이 한번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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