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부담갖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 봐요~”
오래 전 군 복무시절 대대장은 항상 떠들어댔다.
자기를 동네 친한 아저씨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의견이나 생각을 얘기하라고.
그 말하는 톤도 기억난다. 세상 좋은 사람인 척, 나는 다 이해한다는 척, 하는 말투와 표정.(실체를 알기 전까진 거기 감쪽같이 속았었지)
언젠가 그가 내무반에 들렀다. 당연히 모든 중대원들은 미리 청소하고 각잡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다들 고생 많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장개업한 가게 앞에서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홍보하는 도우미같은 톤이었다.)
"이번에 ㅇㅇ님(높으신 분)이 우리 부대에 방문하시는데, ㅇㅇ공사를 해야한다. ㅇㅇ중대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블라블라. 혹시 다른 의견이나 하고 싶은말 있는 사람은 편~하게 말해보자!"
편하게 말하라고, 자기는 열려있다고 하도 이야기를 해 놓은터라, 말년인 김병장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중대는 이미 ㅇㅇ업무와 훈련, ㅇㅇ작업으로 다들 고생중입니다. 대대장님,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저희 중대말고 다른 중대가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병장은 '편하게 이야기해보라'는 함정에 걸렸다.
"......"
대대장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뭐?!! 누가 그런 의견 내래?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시간 아깝게 말야."
"죄송합니다!"
"그럼 공사는 누가하나!! 어떻게 하면 열심히 잘 할 수 있는지!! 그런 의견을 내야지 말야!"
"죄송합니다!"
대대장은 미친사람처럼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자자, 다른 의견은 없나?"
라고 말했다.
소름끼치는 호러 영화가 따로 없었다.
그 이후 우리 중대는,
여러가지 이유로 얼차려 , 위생점검 , 긴급야간훈련 , 외출외박통제 등등 다양한 패널티를 받았다. 설마, 김병장의 질문이 마음에 안들어서 대대장이 우리를 괴롭혔을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마.
그렇다면 회사는 다를까?
똑같다.
편하게 이야기해보라고 한다.
자리보전을 위한 관심과제(한 방 터뜨려서 임기를 2년 더 연장할 수 있는)만 찍어내리는 임원들은, 상명하복식 수명업무만 시키고, 정작 실무의 어려움은 무시하면서, 편하게 얘기해보란다.
아무때나 자기 자리로 찾아오라는데, 따로 사용하는 널찍하고 독립된 ‘임원’ 사무실로 제 발로 걸어 찾아갈 일반 직원은 없다. 수평적인 문화라면 업무 좌석 조정이 필요한 이유다. 공간 구성은 문화를 그대로 나타낸다.
김차장은 그 말을 믿었다. 큰 용기를 내, 임원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솔직하게 의견을 이야기한다.
"저희 운영업무가 과중합니다. 실무자들 스트레스도 많고,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 ㅇㅇ프로젝트 보다는 현 레거시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차장은 ‘편하게 이야기해보라'는 함정에 걸렸다.
임원은 갑자기 예의 그 가식적인 웃음기가 사라진다.
"아 그런 이야기 하지말고! 그럼 ㅇㅇ프로젝트 는 언제하나? 응!? 지난번에 시킨 건 어떻게 됐어! 김차장 나한테 제대로 보고하고 있는 건 맞아?!"
(여기서 'ㅇㅇ프로젝트'는 글로벌을 기치로 임원이 열심히 광을 팔고 다니는 본인 KPI 프로젝트다.)
그리고 바로,
"자자, 편하게 얘기해보세요. 저는 열려있습니다~" 라고 웃으며 말한다.
소름.
이런게, 수평적이고 활발히 소통하는 문화란다. ㅋㅋㅋ
여기서 저들이 '편하게 이야기해보라'는 건,
'내가 듣고 싶은 것만 이야기 하라' 는 것이다.
'니 의견 따위는 상관없고, 내가 관심있는 것만 듣겠다'는 것이다.
왜냐면
'내 성과에 따른 자리보전과 계약연장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니까'
'너희 사병들이나 실무자들의 자잘한 어려움 따위는 듣고 싶지 않고 관심도 없고, 귀찮으니까'
‘애민‘이나 ’긍휼‘의 정신은 찾아 볼 수 없다.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대대장 위치에 앉아있다?
전투에서 패배하는 건 불보듯 뻔하다.
(과연 전쟁이 나면 사병들이 그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싸울까? 뒤에서 총이라도 쏘지 않으면 다행이다.)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특권이다.“
- 올리버 웬들 홈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아직 부회장으로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경청'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이건희 부회장에게 주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이다. 분기마다 10조씩 영업이익을 내는 삼성도 그렇게 한다. 리더에게 '열심히 들으라고' 한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된다 '열심히' 들어야 한다.) 지혜를 갖춘 리더가 되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아니, 나는 준비가 되었는데 아무도 말을 안하는 걸 어떻게 해요?' 라고 말하는 보직자들이 있다.
어떻게 확인하냐고?
전무님,
혹시 최근에 누군가 당신 의견에 대놓고 반박한 적이 있나요?
아니면 전무님이 지시한 모든 메신저에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만 돌아오나요?
반박이 자주 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더 '열심히' 경청하시면 되겠습니다. 실무는 실무자들이 훨씬 잘 압니다. 믿고 위임하세요. 업무 주도권을 넘겨주세요. 요즘 젊은 친구들 다들 똑똑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가 많이 돌아온다면, 문제가 심각한겁니다. '음, 다들 내 지시에 잘 따르고 있군. 다음 임원 계약 연장도 문제없겠어. 룰루랄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마 ”네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라고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전무님이 전 회사에서 데려온 낙하산들일 가능성이 높구요. 나머지는 이상하게 별 의견 없이, 조용히 시키는 일이나 할껍니다.
다들 침묵하고 있는겁니다. 침묵은 가장 강력한 경멸의 수단이니까요.
리더라면 '애정과 관심을 담아' 들어야 한다.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혼을 실어’ 경청해야 한다.
그래야 조직원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는다.
존경과 신뢰는 결국 자발적인 동기부여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훌륭한 실적과 성과, 더 나아가 팀원들의 성장으로 나타난다. 성장하는 팀원들이 모여있는 조직이라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
나 역시 더 잘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입을 닫고 귀를 열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