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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Sep 16. 2023

미니멀, 자잘한게 더 어려운 법

얌전한 잡동사니 정리하기


사는 건 쉽다.

'필요한가?' , YES → '산다'

아주 쉽다. 별다른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


버리는 건 어렵다.

'필요 없는가?', YES → '추억이 서린 물건은 아닌가?' ,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은 아닌가?' , '그냥 두면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 , '혹시 주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주는건 어떤가?' , '그냥 버리는 건 낭비 아닌가?' , '환경을 생각해야지' , '이걸 얼마에 샀더라?' , '다시 보니 괜찮은데?' , '유행은 돌고 돈다며?'

갑자기 아이디어가 샘솟고, 뇌가 풀가동하며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결국, 에이 몰라, 버리긴 뭘 버려, 그냥 서랍에 넣어놓자. 로 마무리 된다.


우리는 잘 버려야 한다. 그래야 간소해진다.

간소해야 담박하게 살 수 있다.


큰 물건은 비우기 쉽다. 부피가 크니 자주 눈에 띄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에 늘 제거 대상 1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오며가며 자꾸 신경쓰인다. 그래서 큰 물건은 과감히 처리하기 용이하다.


작은 것들이 문제다.

자잘한 것들은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나는 그걸 '얌전하다'고 표현하는데, 얌전한 잡동사니들은 버리기 참 어렵다. '이 정도는 뭐 그냥 서랍 구석 한켠에 둬도 괜찮은거 아닌가? 눈에 띄지도 않잖아?' 라는 자기 합리화가 동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얌전한 잡동사니들은 집안 구석구석에 조용히 자리잡는다. 그렇게 1년, 2년, 10년을 간다. 이삿짐 속에 숨어 조용히 따라다닌다.


자잘한 물건들은 과감히 마음먹고 날을 잡아서 치워야 한다.

최근에 정리한 얌전한 잡동사니들을 기록한다.


볼펜들

'볼펜'이라고 안하고 '볼펜들' 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의 군집을 이뤄 자가증식하는 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볼펜들은 집으로 조금씩 잠입해 들어와 어느새 수십개가 쌓인다. 늘 무리지어 있다. 서랍, 필통, 비닐팩, 상자들 속을 열어보면 '볼펜들'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있다.

언제 이렇게 많아졌나 싶을 정도로 집안 구석구석에 놓여있다. 도대체 볼펜은 왜 자꾸 늘어나는 걸까.

추측해보자면, 내 미니멀라이프를 못마땅해하는 누군가가 우리 집에 몰래 볼펜을 투척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일종의 테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llpens.jpg


일반 가정집에서 필기도구는 단 몇 개면 충분하다. 내가 한석봉도 아닌데, 손글씨를 그렇게 많이 쓸 일도 없고, 설사 필사를 하는 취미가 있더라도 마음에 드는 필기구 한두개 정도면 취미 생활을 즐기기 적당하다.


몇 년 전이었나. '그래, 정리해보자!' 라고 마음먹고, 어느날 갑자기 볼펜을 전부 그러모아 상자에 넣었다. 버릴까? 하다가, 뭔가 아쉬웠다. '그래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창고나 선반 한 구석에 올려놓고 잊어버렸다.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눈에 안보이고, 가끔 보인다 쳐도 '저 정도야 뭐 괜찮지, 볼펜은 늘 쓰잖아?' 라며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필요 없다면 집 안에 있을 수 없다. 그건 용납할 수 없다. 얼마 전 다시 한번 온 집안의 볼펜을 정리했다. 이번에야말로! 일단 사용 가능한 놈들과, 망가진 놈들로 분류한다. 이면지를 가져다 놓고, 볼펜을 하나하나 테스트 한다. 오래 됐으니, 잉크가 굳어서 안나오겠지? 두근두근 기대하며 종이에 슥 써보면, 웬걸. 아주 잘 나온다. 그 때 실망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고장난 볼펜이라야 맘편히 쉽게 버릴 수 있는데, 잉크가 나오면 낭패잖는가. 하지만 과감히 버린다. 잉크가 나와도 필요 없는 건 필요 없는 거다. 결국 검은 볼펜 몇 개, 색깔 볼펜 몇 개, 형광펜 몇 개 정도 남기고 나머진 싹 다 버렸다. 모자라면 사면 된다. 그럴 일은 없어 보이지만.



외국 동전

보통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출국장 면세점에서 남은 그 나라 지폐 등 현금은 다 써버린다. 그런데 동전이 문제다. 지폐로 딱딱 떨어지게 계산하다보면, 늘 동전이 남는다. 몇 개 안되기도 하고, 기념품 삼아 봉투에 넣어 놓는데, 그게 벌써 수십 개가 넘었다. 은근히 신경쓰인다. 볼펜들 처럼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그러려니 했다. 극한의 얌전함이다. 그런데 정리하고 싶다. 왜 문득 그런 날이 있잖는가. 이 동전들은 이제 어느 나라 돈인지 구분도 안간다. 버리긴 아깝고, 은행에 가져가서 환전하자니 동전은 또 안해준단다. 답답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Kiloware.JPG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니 '동전환전소'라는 어플이 있더라.(광고 아닙니다.) 앱을 깔고, 지정된 장소에 가서 동전을 넣으면 환전해서 약속된 계좌로 입금해준다. 7일 정도 걸린다던데, 아직 입금이 안되어 모르겠다. (글을 쓰던 중에 입금이 완료되었다. 9일만이다. 이 정도면 기다릴만 하다.) 나는 이런 앱들이 성공하길 바란다. 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해주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회사들. 아무도 하지 않는 수고로운 일에 뛰어드는 회사들 말이다. 응원합니다. '동전환전소'


케이블

5핀, 8핀, A타입, C타입, 각종 어댑터들, 이어폰 수십개 등등 이 어느새 커다란 한 박스를 가득채웠다. 어디에 쓰이는 줄도 모르겠는 어댑터들은 본체는 사라지고 케이블만 남아있다. 혹시 필요할 때 없으면 어쩌나, 언젠간 쓰겠지, 누가 부탁하면 줘야지, 이런 생각으로 박스 안에서 몇 년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다.


https://www.realtor.com/advice/home-improvement/organize-cords/


 많이 필요 한가? 그렇지 않다. 혹시 전파사를 차릴 예정인가? 그렇지 않다. 집안에 있는 전자기기 갯수를 생각하면 필요한 케이블의 수는 파악 가능하다. 나머지는? 당연히 버려도 된다. 혹시 버리고 나서 필요하면 구매하면 된다. 지금은 예전처럼 케이블이 필요하다고 용산을 가거나, 철물점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에서 단 몇 분이면 필요한 케이블 구매가 즉시 가능하다. 걱정할 것 없다. 케이블이 가득찬 박스를 뒤집어 엎고, 하나하나 상태를 본다. 당연히 작동은 하겠지. 필요가 없을 뿐. 타입별,길이별로 한두개만 남겨놓고 모두 버렸다.



'얌전한 잡동사니'들을 몇 가지 처리하니 기분이 후련하다.

이렇게 나는 조금 더 가벼워 홀가분해졌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비우면 반드시 문제가 개선되고 삶이 건강해진다.

복잡한 환경은 정신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단출한 상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내일은 또 어떤걸 정리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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