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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Sep 09. 2023

염색을 하다가 바나나우유가 먹고 싶어졌다

케케묵은 이야기


옛날 목욕탕 (https://biz.chosun.com/topics/topics_social/2022/04/30/3DAFXXVAFJBHFL6XX5Q65VODKA/)


나른한 주말 오전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같이 목욕탕에 가곤했다.


보통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느지막이 움직였다. 슬리퍼를 신고 슬슬 걸어간 동네 목욕탕 입구에는 카운터가 있었다. '어른 하나, 국민학생 하나요.' 입구에서 계산을 하면 아주머니가 큰 숫자가 적힌 투박한 락커 키를 주셨다.


주말 오전 목욕탕엔 사람이 늘 많았다. 시끄럽게 틀어놓은 TV에는 '전국 노래 자랑' 뭐 그런 류의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꼭 사우나에 데리고 들어가셨는데, 남자가 뜨거운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너무 뜨거우면 나가도 되니까 억지로 참지는 말라'고 하셨다. 노란 불빛으로 가득찬 사우나 안은 후끈후끈 뜨겁고, 어쩐지 달콤한 냄새가 났다. 나는 눈치껏 좀 참다가, 밖으로 냅다 도망나와 냉탕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뜨거운 물을 좋아하셨다. 열탕에 들어가 눈을 감고 하염없이 앉아 계셨다. 지금은 나도 나이가 들어 뜨거운 물에 들어가 앉아 있는걸 좋아하지만,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유난히 따분했다. 아버지가 열탕에 들어가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냉탕에서 수영을 하거나, 부글부글 물방울이 올라오는 중온탕에서 지루함을 달랬다.


당시 동네 목욕탕엔 세신사분들이 있어서, 때를 밀어주었다. 때를 불리고 차례가 되어 세신사께 때를 밀어달라고 한다. 나는 냉탕에서 놀다가 세신사분께 가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세신사는 '야! 때가 하나도 안 불었잖아! 이자식 이거, 너 저기 뜨거운 물 들어가서 때 더 불리고 와라!' 라고 나를 쫓아내곤 했다. 나는 투덜투덜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온탕에 몸을 담궜다.


목욕이 끝나면 바나나 우유나 비닐팩에 든 커피우유를 사주셔서 먹곤했다. 나는 중학생 때 까지만 목욕탕에 아버지를 따라 갔다. 고등학생이 되니 어쩐지 같이 가기 싫어져서, 따로 친구들과 갔다. 사춘기였나보다. 아버지가 조금 섭섭해 하셨던 기억이 난다.


목욕탕 이발소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113014168299163)


목욕탕 안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곳에서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셨다. 흰머리가 많았는데, 성격상 그걸 용납하지 않는 분이어서 늘 새까맣게 염색을 하셨다. 나는 옆에서 종종 구경했다. 이발소 의자에 앉으면, 하얀 가운을 걸친 나이 지긋한 이발사분이 작은 그릇에 염색약을 담아와 머리에 발라주셨다. 약이 찐득하고 냄새도 지독했다. 이발사 할아버지는 오랜시간동안 염색약을 정성들여 골고루 발랐다. 약을 다 바르면, 아버지는 영화 속 배우처럼 올백머리가 되었다. 어린 내 눈엔 그게 멋지게 보였다. 선반 위 고물 라디오에서는 잡음 섞인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새까만 염색약을 바른 채, 조용히 신문을 읽고 있던 아버지가 기억난다.



이윽고 내가 늙어, 당시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나도 흰머리가 많다. 새치가 있는 편이다. 염색이 필요하다. 전체 염색을 할 필요는 없는데 미용실에 가면, 약을 머리 전체에 바른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간단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염색을 할 수 있을지 이런 저런 시도를 많이 해봤다.


염색약을 사다가 집에서 직접 해봤는데, 손에 묻고, 세면대에 묻고, 온갖 신경을 써야 하더라. 게다가 약이 독하다. 냄새도 성분도 화학약품 그 자체라 자주 머리 전체에 바르기 꺼려진다. 가장 신경쓰이는 건, 시간 낭비다. 미용실에 가서 염색하는데 들어가는 품이며 시간이 아깝다. 나이들면 신경쓸게 점점 많아지는게 불편하구나.


그러던 와중에 '물염색'이라는게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편하단다. 게다가 비건인증까지 받아서 독하지 않다네. 그래? 그렇다면 시도해봐야지. 참고로, 이건 광고가 아니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도움이 될까해서 개인적인 느낌을 기록하는 글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올리지 않겠다.


커피믹스처럼 생긴 스틱을 뜯어 동봉된 쉐이커에 물과 함께 넣는다. 열심이 흔든 후, 2~3분 숙성시킨다. 그리고 머리에 바르면 그만이었다. 간편하다. 게다가, 지독한 냄새도 거의 안나고, 묻어도 닦아내니 금새 지워졌다. (독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봉숭아물을 들이는 기전을 이용했다니, 화학약품 폭탄은 아닌 듯 하다.


30분 후 머리를 감아보니, 제법 결과가 좋다. 오호. 집에서 간편하고, 안전하게 새치 염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역시 기술의 발전은 놀랍다. 인간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 뭐 써보다보면 단점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계속 써 볼 의향이 있다.


오락가락 갈팡질팡 하며, 자신에게 맞는 걸 찾아나가는게 인생 아니겠는가.


어느덧,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혼자 염색을 하고 있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간편한 염색약이 있다고, 한 번 써보시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다면 참 좋겠구나.


오랜만에 바나나 우유가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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