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토요일 밤엔 뮤지컬을
토요일 저녁, 조용히 비가 내린다. 이태원 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심각하다. 강남대로 지나 한남대교로 넘너가는 길은 포기한다. 반포대교를 선택했다. 그래도 밀리는 건 매한가지. 차창 앞에서 열심히 작동해준 와이퍼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이태원으로 무사히 넘어왔다.
해밀턴 호텔 앞은 불야성이다. 길거리엔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토요일 밤을 즐긴다. 내리는 비 쯤은 젊음을 즐기는 데 방해되지 않나보다. 나는 요새 비오면 나가기 싫다. 막히는 길을 뚫고 도착한, 오늘의 목적지는 블루스퀘어.
오늘 밤 공연이 많은가보다. 이미 주차전쟁이 시작됐다. 주차요원 분이 요상한데로 유도하더니 갑자기 선불이라며 5,000원을 달라신다. 부랴부랴 대시보드를 뒤졌더니 현금이 조금 있다. 아, 다행이다.
"공연 끝나면 바로 차 빼주셔야 합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서울은 주차가 난리긴 난리다.
한 시간 일찍 왔는데도 이렇다니, 조금 늦었으면 빙글빙글 돌며 주차장을 찾아다닐 뻔 했다.
티켓팅하고, 2층 카페로 왔다. 배고프다. 하지만 베이커리 류는 모두 품절. 사람이 많다.
커피 마신다.
비 오는 거리가 운치있다.
뮤지컬 보러 왔다.
공연을 보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일하는 것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술이나 과학과 가까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공연/전시회 관람을 통해 감각과 감정을 북돋아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오늘 관람을 통해, 기분좋게 집중하며, 한 단계 더 성숙한 감각을 아주 조금이나마 얻어갔으면 좋겠다.
‘레베카’를 본다. 오스트리아 뮤지컬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원작 소설 '레베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영화로 만든 적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추가>
뮤지컬을 보고나서 1940년작,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를 찾아서 봤다. 극의 전개와 대사까지 거의 똑같은 걸로 봐서, 뮤지컬 '레베카'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을 바탕으로 살짝 각색 정도만 한게 아닌가 싶다. 영화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다. 1940년에 만든 영화가 이리도 재미있다니, 히치콕 당신은 정말.
뮤지컬 레베카가 한국에서는 벌써 공연 10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꽤 인기 작품인 듯.
오늘의 캐스팅. 나는 뮤지컬 배우를 잘 모른다. 조승우 배우가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금 이 순간'을 불렀다는 수준의 정보만 알고 있을 뿐이다.(지킬 앤 하이드 본 적 없음) 어디보자, 혹시 내가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 막심 역할에 ‘테이’.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좋아했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반갑습니다. ‘웬디’는 레드 벨벳이라는 그룹 멤버라는데 내가 그쪽을 잘 몰라서 아무튼. 캐스팅이 이렇구나. 잘 부탁합니다.
블루스퀘어 여기저기에 공연 관련 포토존을 마련해놨다. 마케팅의 일환으로 보인다. 요새는 모름지기 입소문의 시대.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해두면, 관객들이 알아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공유한다. 예전처럼 광고 만들어 뿌리고, 예능에 출연자 내보내기 만으로는 힘든 분위기. 여러모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다. 마케팅 방식은 이렇게 진화하는데, 미래에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된다.
공연은 총 3시간 가량 소요됐다. 중간에 인터미션(이라고 하지만 나는 '막간'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 20분이 주어졌다. 3시간이면 진짜 긴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다. 극의 짜임새가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했고, 특유의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딱 내 취향이었다.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다.) 넋 놓고 봤다. 5월 쯤, 캣츠를 보았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캣츠는 '흥미롭다' 정도였는데, 레베카는 재관람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물론 10주년 이라서, 특별히 공을 들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쫄깃하고, 서사 구성이 탄탄하다. 공포 스릴러를 가미한 이야기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 했다. 어느 한구석 놓치는 부분이 없이 재밌다. 원작 소설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 역시 롱런하는 공연에는 이유가 있나보다.
특수효과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기술의 발전 덕분인지 무대 전환이나 표현이 영화 못지 않다. 폭풍우를 표현한다거나(실제로 무대 한쪽에서 비가 내리더라), 테라스의 안쪽과 바깥쪽을 넘나들며 표현하는 방식은 기가 막혔다.
테이는 가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저렇게 잘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게 '막심'을 표현했다. 바닷가에서 절규하며 노래하는 장면은 솔직히 많이 놀랐다. 근데 테이가 배우 생활을 했던 적이 있던가. 기억이 잘 안난다. 노래야 뭐 말해 무엇하랴. 테이잖는가. 운이 좋아서, 1층 무대 가까운 곳에서 관람했는데 키가 크고 태가 나더라. ('저녁 식사에서 봐요' 대사를 살짝 실수했던 건 자연스러웠습니다.)
https://youtu.be/BPPSIKrBCd0?si=HMcciyGJqx7obtf_
다른 배우들도 당연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웬디'는 아이돌 이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이게 웬걸, 거의 모든 장면에 다 등장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연기하며, 노래는 또 그렇게 잘 부르는지? 심지어 뛰어다니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부르더라. 선입견 가졌던 거 죄송합니다. 훌륭한 연기였어요. '댄버스 부인' 역할의 배우 분도 진짜 소름끼치게 연기와 노래를 잘 하시던데, 이거 지금 CD 재생해 놓은거 아냐? 하는 순간이 많았다. 그만큼 놀라울 정도로 잘 하셨다. 그 엄청난 고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솔직히 매번 뮤지컬에 갈 때마다, 혹시 립싱크 아냐?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왜냐면 저렇게 춤추고 연기하며 흔들림없이 노래할 수 있다는게 믿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엄청난 연습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춤추며 동시에 노래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고 있다. 옛날 회사 회식 후 노래방에서 흥이 오른 부장님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오케스트라 쪽에 가서 슬쩍 구경했는데, 지휘자 분의 자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지휘석에는 두꺼운 악보가 있고, 각종 복잡한 컨트롤러와 함께 왼쪽엔 맥북이 놓여 있더라. 아마 맥북으로 각종 사운드를 조종하고 음악을 재생하신 듯 한데, 전체적으로 마치 비행기 조종석 같다고 느꼈다. 지휘와 음악 컨트롤을 같이 하다니, 파일럿과 다를 바 없잖는가. 지휘자의 앞쪽에는 각종 악기를 담당하시는 분들이 앉아서 각자 맡은 부분을 연주했다. 말 그대로 오케스트라.
'그냥 음악 파일을 틀어놓은 게 아니다' 라는 점이 뮤지컬의 매력이다. 일종의 아날로그 코드라고 봐도 될까. 티비로 보는 작품과 달리, 모든 악기 연주자가 모여 앉아 실제로 관객 앞에서 연주하고, 배우는 직접 연기하며 라이브로 노래를 부른다. 감동적인 협업이다. 이러니 감정이 고양될 수 밖에. 새삼 뮤지컬은 집약적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공연을 볼 때마다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나도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저 정도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잠깐 반성하게 됐다.
나는 공연 문화에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대체 왜 공연장 내에서 사진 찍지 말라는 가이드를 무시하고 사진을 찍는걸까. 진행요원은 '사진 찍지 말라'고 계속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돌아다니는데, 안쓰럽지도 않은건지? 대체 왜 찍는 것인가. 혹시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좋은 문화를 즐기러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정작 문화 규범이나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는 건 어쩐지 우습다. 그게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공연 보고 갑자기 사회 이야기까지 너무 멀리 왔다.
아무튼, 행복한 공연 관람이었다.
뮤지컬 '레베카' 10주년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