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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Sep 22. 2023

미니멀, 생각 걷어내기

가장 간소한 운동법



물 속에서 떠오르는 물방울을 손으로 막아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어린시절 목욕탕이나 수영장에서 해 볼 법한 장난이다. 물방울은 얄밉게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떠오른다. 막아도 막아도 솟아오른다. 커다란 물방울을 손바닥으로 막아서면, 여러 개로 작게 나뉘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떠오른다. 떠오르는 물방울은 막기 힘들다. 그게 자잘한 것일수록 더 어렵다.


‘생각’이 그렇다.


생각은 물방울과 같아서, 멈추려고 해도 솟아오른다. 그래서 생각을 '떠오른다'라고 한다.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면, 잡으려 하면 안된다. 그냥 놓아두어야 한다. 떠올라 내 옆을 지나 흘러가게 놔둬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자꾸 쳐다보고, 막으려고 하고, 움켜쥐고 싶다. 그러다보니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생각은 물방울 처럼 작게 나뉘어져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생각이 많은 성격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단순한 상상에서 망상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화도 나고 아무래도 여러모로 좋지 않다. 미니멀하게 살고 싶다면, 물건이든 생각이든 많은 건 좋지 않다. 간결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고민은 그걸 방해한다. 미니멀한 삶에서 '생각을 줄이는 것'은 적은 물건 만큼이나 중요하다.


머릿속을 미니멀하게 만들고 싶을 땐, 명상을 한다.

내 명상은 '걷기'다.


마침 날이 선선해졌다.

대충 주워입고 길을 나선다.

걷기의 좋은 점은 특별한 장비나 준비물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운동한답시고 장비 쇼핑을 하거나 관련 의류를 구입하는 등, 이런저런 물건을 집안가득 들이지 않아도 된다. 걷기는 간소함을 유지한 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 그래서 옛 현인들은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먼 길을 가볍게, 그리고 오래 걸었나보다.



걷는데 늦고 빠른 시간은 없다. 뙤약볕 아래만 아니라면 아무때나 걸을 수 있다.

지금은 늦은 시간이라 가게들은 이미 대부분 문을 닫았다. 거리는 어둡고 한산하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시끄러운 것들이 사라진 길은, 조용히 관찰하기 딱 좋다.


도로를 따라 어디론가 달리는 자동차들이 붉은 브레이크 등으로 차도를 알록달록 수놓는다.

밤 늦은 퇴근길을 서두르는 몇몇 사람들이 종종 걸음 한다.

얼큰하게 취해 길 한가운데 서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피해 지나간다.

광역 버스를 기다리는 긴 줄에 선,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 표정이 어쩐지 허전하다.

홀로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직장인 아저씨는 무얼 망설이는걸까.


이런 저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가만히 걷다보면 잡생각은 사라지고, 머릿속은 차분해진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물끄러미 생각을 들여다본다. 흘러가는 생각들을 잡지 않는다. 가만히 쳐다본다. 시큰둥하게 살고 싶은데, 시큰둥해지기가 참 쉽지 않다. 부처님 최후의 마음가짐은 '시큰둥'이 아니었을까. 마음은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납득하는 것인데 그 과정이 지난하다. 누가 알아챌까 남우세하다. 결국 모든 건 내 탓이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인데 누굴 탓하랴. 물끄러미 바라보며, 매사에 시큰둥해지자. 그걸 깨닫기까지, 아니 잊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이거봐. 또 금새 생각이 많아진다. 머무적머무적. 아직 멀었구나. 호흡에 집중하고 주변을 관찰하며 걷자.


표지판 속, 어른의 손을 꼭 잡은 아이가 귀엽다.


간단히 산책하려고 나왔는데 어느덧 걷다보니 너무 멀리 와버렸다. 넋놓고 걷다보면 이런 일이 잦다. 괜찮다. 다시 돌아가는 시간 만큼 '시큰둥'해 질 수 있다. 온 길을 따라 다시 한 걸음씩 돌아간다.


오며가며 두 시간 정도 걸었다. 아니 명상이라고 부르자. 생각을 손에 쥘 순 없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물방울을 가만히,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수 있었다. 물방울을 잡아채려 애쓰지 않았다. 차분해졌다. 시큰둥까지는 아직 멀었나보다. 얼마나 더 수련해야 되는지. 하다 보면 마침내 깨닫는 그 날이 올지 모르겠다.


떼어내다 남은 스티커 자국 같은 구름이다


스티커 자국처럼 지저분한 정신은 반드시 행동과 말에 영향을 끼친다. 물건을 줄이는 미니멀리즘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간결함이다. 시큰둥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무례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욕심없이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그게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주변을 미니멀하게 만들 수 있다.


생각이 복잡해질 땐 걷는다. 가장 단순하고 간소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수양의 방법. 걷기. 언젠가 생각이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그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무덤덤하게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날까지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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