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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Sep 20. 2023

식껍, 선선한 가을 저녁엔 숯불구이가 제격이지

우리 아들 최애 고기집


식사 메뉴 고르는 게 참 어렵다. 세상에 음식 종류는 이리도 많은데, 정작 먹고 싶어서 딱 떠오르는 그 단 하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점심은 대충 나 혼자 떼우면 되니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만, 저녁 식사는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기 어렵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아들에게 자주 물어본다. '뭐 먹고 싶어?' 물을 때마다 아들은 '맛있는거~' 라고 대답한다. 그럼 그렇지. 가만있어보자. 맛있는게 뭐가 있더라.


"아빠, 오늘 저녁 식껍 어때?"

"?? 니가 웬일이냐?"

정확한 메뉴를 이야기해주지 않는 아들이 먹고싶은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그건 정말 먹고싶은 거다. 아들 친구들 쓰는 말을 빌려보면, '이건 찐이다.' 그렇다면 가야지.


"콜"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저녁 공기가 이제 선선하다. 장난도 치고 낄낄 농담도 하며 걷는다. 걷다가 옆을 보니, 어느새 키가 부쩍 솟아 내 어깨 부근까지 올라왔다. 듬직하기도 하고, 많이 컸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식껍에 도착했다.

식껍은 가게 이름이다. 아마 체인점인 듯 한데, 뜻은 잘 모르겠다.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식겁하다는 뜻인건지. 무슨 상관이냐. 맛만 있으면 됐지.


"두명이요"

"오늘 예약이 많아서,, 이쪽에 앉으시겠어요?"


그러고보니, 거의 모든 테이블에 '예약'이라고 적힌 번쩍번쩍한 금속판이 세워져있다. 팀 회식이라도 오는 모양이다. 어떤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요일 저녁 회식이라니 정말 최악이군. 이라고 생각하며 지정해준 자리에 앉는다.


"모듬구이 한 판 주세요."

올 때 마다 우리는 모듬구이를 먹는다. 다양한 부위를 경험할 수 있는 데다가 양도 적당하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먹다가 꽂힌 부위 하나 더 시켜 먹으면 딱 좋다.


나왔다.

와규등심은 이미 불 위로 올라갔다


불에 올린다.

오늘 숯이 좋다.


아름답다


지글지글 익숙한 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익숙한 소리에 아는 냄새가 곁들여져 오감을 자극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고기를 불에 구워먹었을까, 그 첫경험은 무척 충격적이었겠지. 생고기만 먹던 인류가 불에 익힌 고기의 맛을 경험한 그 순간. 호모사피엔스는 아마 일종의 각성을 하지 않았을까. 그걸 진화라고 불러도 되려나.


윤이 난다


밑반찬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파절이, 파무침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거랑 양파절임, 파김치, 마카로니무침, 무생채 뭐 그런 것들인데 일단은 고기가 우선이다. 이미 내 뇌는 고기의 맛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며 다른 회로는 차단한 상태다. 고기, 고기를 달라.



상추와 깻잎을 구운 고기와 함께 먹으면 맛이 좋다는 건 상식이다. 학교에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한국인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페어링이다. 페어링은 이런데 쓰는 단어가 아니라고? 페어링이 육류는 레드, 생선은 화이트 처럼 와인에 곁들이는 음식의 조합, 그런걸 말한다던데, 같이 좀 씁시다. '숯불고기와 상추,깻잎은 푸드 페어링이 좋다' 이거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마늘과 파절이도 추가한 내 맘대로 페어링


마무리는 밀면과 된장술밥으로 식사 겸 먹었다. 그냥 고기만 먹으면 섭섭하잖아. 여긴 특이하게 냉면이 없고 밀면이 있는데, 국물의 맛은 냉면과 비슷하지만 면의 식감이 조금 더 쫄깃하다. 거기에 시원한 열무김치가 곁들여져 새콤달콤 자극적인 맛을 뽐낸다. 가끔 어떤 고기집에선 냉면이 충분히 차갑지 않아서 실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긴 육수가 적당히 얼어있어서 반갑다. 느끼한 고기를 먹고 입을 정돈하기엔 역시 시원한 국수가 최고다.


밀면 (음식 사진계의 이단아인 나는, 반쯤 먹다 찍었다)


된장술밥은 앞 테이블에서 누가 맛있게 먹길래 시켜봤다. 된장찌게에 밥을 넣어 끓인 건데, 이름처럼 술마실 때 먹어야 안성맞춤이겠지만, 뭐 멀쩡한 정신에 먹어도 맛만 있으면 됐지. 된장술밥은 많이 짜지 않아 적당히 슴슴하고, 두부가 굵어 씹는 맛이 있다. 청국장을 살짝 섞었나? 싶은 맛이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계속 먹힌다. 아들이랑 밀면과 된장술밥을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술밥때문에 당연히 맥주 생각이 났지만, 어린 아들과 단 둘이 밥 먹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맥주는 시키지 않았다. 취기 없이 아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이 소중하다.


된장술밥


아들은 내가 안먹고 자기한테 몰아줄까봐 계속 나를 지켜본다. 고기도 국수도 다 그런식이다. 내가 몰래몰래 아들 앞접시에 올려놓으면, 어김없이 나에게 돌려주며, "난 괜찮으니까 아빠도 먹어." 라고 이야기해준다. 다정한 짜식.


실제로 내가 먹고 안먹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배려한다는 자체가 기특하고 대견하다. 이제 더 자라서, 사회에 나가거나,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렇게 양보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너무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지금도 잘 하고 있다. 자랑스럽다.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아들을 믿는다.


배부르게 먹고 돌아오며 걷는 길에 아들이 말했다.

"후식? 아이스크림 어때?"


얼마든지.

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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