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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Nov 24. 2023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 주소 좀 알려주세요

- 왜

- 얼마전에 선물받은 감귤 진짜 너무 맛있어서, 한 박스 보내드리려고요. 지금 시켜야돼요

- ㅋㅋㅋ 괜찮다

- 빨리 알려주세요


J가 감귤을 보내준다고 한다.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우리 집에도 보내준다는 것인데, 그 마음이 정말 고맙다. 그런 생각이 쉽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J를 알게된 건 15년 전이다. 나는 당시 작은 서비스의 개발자로 지내고 있었다. 혼자 일하기에 조금 벅차다고 느끼기 시작한 3년 차 정도 였던걸로 기억한다. 1명 더 투입해 준다고, 조직장이 말했다. 나는 기뻤다. 군대에서 말하는 '부사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군 관련 비유를 좋아한다.)


당시 우리 실에 많은 신입사원들이 입사했고, 그 중 한 명이 내 후배가 될 터였다. 나는 걱정됐다. 좋은 사람이 와 주길 바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J가 내 업무로 배정되었다. 내가 맞이한 첫 후배이자 부사수였다.


조금 웃기는 일이긴 하다. 회사생활 2년 정도 먼저했다고, 누굴 후배로 맞아 어쩌고저쩌고 가르친다는 건 좀 부끄럽다. 하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진지해서,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하고 엄격한 척 참견도 많이했다. J가 당시 정색하는 표정의 내 흉내를 내며 놀리는데,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고집, 아니 아집이 지독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와 협업했던 후배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같이 일하던 후배들이 갑자기 총을 들고 찾아와 이렇게 말할까봐 걱정이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영화 '달콤한 인생')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당시 J의 많은 동기들 중, J는 태도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단연 으뜸이었다. 그의 좋은 평판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 귀에 들어왔다. 나중에는 J를 영입하려고 여러 팀에서 눈독을 들였었다. “J씨 우리팀이 데려가면 안될까?”나는 늘 답했다. “안됩니다~~” 과분하게도, 그런 J가 내 후배가 된 것이다.


J는 무엇보다 일을 잘했다.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스스로 먼저 나서서 일을 처리했으며, 맥락을 파악하고 행간의 숨은 의미를 찾는 데도 빨랐다.(이 능력은 회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업무 결과가 깔끔하고 뒤처리가 좋았다. 관련해서 타 부서와 협업할 때도 늘 웃으며 대하는 좋은 태도로 일관했다. 나는 이 친구가 언젠간 다른 회사로 이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순리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렇게 일을 잘하고 태도가 좋으면 소문이 퍼지고, 외부에서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후 J의 동기들이 하나둘씩 이직을 시작했을 때, J가 나에게 다른 회사에서 온 오퍼 이야기를 했다. 조건도 괜찮았고 인지도도 있던 개발사였는데, 나는 반대했다. J가 떠나는 게 섭섭해서가 아니었다. J가 개발사로 옮기기보다는, 본격적인 금융사 등의 현업으로 이직하길 바랐다. 그래야 더 큰 그림을 보고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J는 영화를 좋아했는데,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는 블루레이까지 사서 모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기상천외한 B급 영화부터, 감독을 골라 영화를 보는 방식까지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당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긴 호흡의 ‘진짜’ 영화를 이야기했다. (요새 유튜브의 10분짜리 영상과는 다르다.) 극장의 스크린 앞에 앉아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직접 감상하고 의견을 나누는, 그런 낭만이 있던 시대였다. J와 나는 영화를 칭찬하고, 때론 비웃고 욕하면서 대화했다. 역시 취향이 비슷하면 같이 일하기 수월하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여름엔 사무실에서 수박을 잘라 먹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나눠먹기도 하던, 정감있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아. 최근에 그의 추천으로 'Severance'(단절) 라는 드라마를 봤는데, 믿고 보는 J의 추천인만큼 재미있었다. 글 흐름과 관계없이 뜬금없지만 추천합니다. (시즌 2 제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그 수염, 맞습니다


당시에 회사에서는 멘토링 제도를 운영했는데, 나와 J는 멘토/멘티가 되어 회사 내 어떤 사이트에 박제(게시)되었다. J의 집에는 아직도 그 사진이 액자에 보관되어 놓여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인데, 당시 내가 너무 괴롭힌 나머지, 사진을 보며 욕하고 싶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다.


얼굴은 가렸어


그는 나보다 먼저 이직했다. 여의도 금융사로 간다고 했다. 나는 당시 J와 다른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떠나는 날 1층으로 찾아와 '저 이제 가요' 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하던 J의 얼굴이 기억난다. 나는 슬프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회사를 떠난다고 관계가 끊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다.) 다른 좋은 회사로 가서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랐다.


며칠 전, J를 만났다. 저녁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요새 일하는 근황도 공유하고, 영화 이야기도 하고, 결혼 생활, 아이들 이야기도 했다. J는 여전히 여의도에서 일하는데, 어느덧 차장이 되었다. 조만간 리더가 될 것 같다고 한다. J의 성격을 아는데, 아마 싫은 소리 안하고 모두 도맡아서 처리하느라 많이 고생하고 있을테다. 그 만큼, 좋은 평판이 쌓이고 있을거고. 윗사람들에게는 핵심 인력으로 인식되고 있을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내 후배들은 대부분 연차와 능력이 되어 리더의 자리에 가까워졌다. 다들 멋진 리더가 되길 바란다.


날이 추워서, 어쩐지 고기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굽는건 냄새가 옷에 배니 제외. 족발을 먹었다. 오랜만에 맥주도 한 잔 했다. 쫄깃한 고기와 시원한 맥주가 있으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

오늘은 먹기 전에 찍었다.


커피를 마셨다. 당시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커피빈에 가고 싶다. 좋아했던 달달한 라떼를 마시면,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헤이즐넛 라떼를 마셨다


인생은 짧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렇게 가끔 보면 된다. 만나서 밥먹고 차마시고 그러면 되는거다. 그런 소소한 것에서 평안을 느끼면 된다. J는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되도록이면 야근 안하고 일찍 퇴근해서 놀아주는 게 낙이라고 한다. 그러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럼 된거다. J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J는 택시가 도착했다며 인사하고 얼른 뛰어갔다.

나도 왠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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