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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Dec 01. 2023

PPT는 21세기 부적이다

PPT사용을 금지하라


조선.

조선은 석달 째 이어지는 가뭄으로 농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조선 ㅇㅇ왕 ㅇㅇ년 경복궁 사정전. 여기, 왕과 신하의 대화가 있다.



'전하, 국토에 가뭄이 들어 온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디 대책을 강구하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옵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흠. 짐이 안그래도 고민이 많았다. 최법사를 들라하라.'


'전하, 일개 무당인 최법사가 무속으로 가뭄을 해결하기는 요원할 것이옵니다. 부디 현실적인 방안을 고민하여 주시옵소서.'


'어허 무엄하다! 그대는 예의를 갖추라. 당장 최법사를 들라하라'


'....'


잠시 후.


'최법사, 전하를 뵈옵니다.'


'그래 최법사, 몇 달째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지독하다. 자네가 해결할 수 있겠는가?'


'부적을 써야합니다. 아주 강한 것으로. 그 부적으로 굿을 벌이면 반드시 다음달 초하루에 비가 내릴 것이옵니다.'


'오! 역시 최법사 답구나. 당장 시행하라.'


며칠 후.


궁궐 넓은 마당이 소란하다. 중간에 커다란 단상이 놓였다. 꽹가리, 북 등을 손에 쥔 악사들이 좌우에 도열해 앉았다. 커다란 부적이 단상 양쪽에 펄럭인다. 그 중간에 요란한 법복을 입고, 양 손엔 칼을 든 최법사가 서 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영화 '곡성'


장구와 꽹가리가 울리고, 최법사의 주문은 계속된다. 그는 부적을 향해 기도한다. 주변의 신하들은 굿판을 지켜보며 답답하지만, 꾹 참는다. 어차피 왕은 듣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왕은 이미 흐뭇하다. 최법사가 써준 부적을 손에 꼭 쥐고 있다. 이 부적이 있으니 문제없다. 이제 비가 내릴 것이가. 굿을 벌였으니 안심이다.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 기분이다. 잘 될 것만 같다.



다시 현재.

A기업은 몇 분기에 걸쳐 이어지는 제품판매감소로 실적 달성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서울 A기업 본사 ㅇㅇ층 사장실. 여기, 사장과 실무 임원의 대화가 있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사장님, 제품 판매량이 급격히 줄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금년 매출은 목표치를 달성하기 힘듭니다. 반품건이 증가하는 등, 아무래도 제품 자체에 문제가 있어보이는데. 실무자들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청취한 후, 방향 조정이 필요합니다.'


'흠. 안그래도 고민이었는데. 전략실 김 실장 들어오라고 해.'


'사장님, 이 문제는 제품 담당 실무부서와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제품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합니다. 전략실은 아무래도 실무와 거리가 있으니, 최 공장장과 제품설계 박 팀장과 이야기 나눠보시죠.'


'부르라면 부르지 웬 말이 많아. 전략실장 당장 들어오라고 해.'


'.....'


잠시 후.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김 실장, 제품 매출이 자꾸 줄어드는데 당신이 해결 좀 해봐.'


'저희가 면밀히 분석해서 PPT 장표 준비하겠습니다. 전략실이 만든 PPT 자료를 보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즉시 해결할 수 있을겁니다. 전 임원 포함한 리뷰회의 잡겠습니다.'


'오, 역시 김 실장. 그래 어서 준비해.'


며칠 후.


본사 12층 대회의실이 소란하다. 사장을 포함한 모든 임원이 여기 모여있다. 커다란 파워포인트 화면이 강당 한쪽을 가득 채운다. 모두 화면을 바라보고 앉았다. 화면 앞에 전략실장이 한 손에 레이저포인터를 들고 서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등 국제 정세가 급격히 요동치는 등.... 우리 A기업도 글로벌 전개를 통해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부합하는....따라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판매루트 개척 및……'


김팀장의 40장짜리 PPT 발표는 계속된다. 바라보는 실무자들은 답답하다. 제품 분석을 해도 모자랄 판에,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며 글로벌 전개를 꿈꾼다. 하지만 실무자들은 꾹 참는다. 어차피 사장은 듣지 않는다. 중간 상석에서 PPT발표를 지켜보는 사장은 이미 흐뭇하다. 이제 제품이 많이 팔릴 것이다. 글로벌로 판매한다니 뿌듯하다. 그림이 참 이쁘구나. 그럴듯한 PPT를 보니 문제없다. 전체 리뷰 회의를 했으니 안심이다.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 기분이다. 다 잘 될 것만 같다.



뜻모를 단어와 그림들로 채워진 장표. 대규모 보고 회의. PPT의 가장 큰 문제점은 PPT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마치 모든 걸 이해하고 상황을 통제하는 듯 한 환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부적을 쓰면 해결된다는 믿음과 비슷하다. 실제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다. PPT에 그려진 플로우는 그저 쉽게 표현한 단어일 뿐이다. 그 이벤트 사이사이 숨겨진 행간의 무겁고 복잡한 의미는 모두 무시된다. '서비스가입' -> '서비스해지' 이렇게 쉽게 표현한 장표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실무들이 생략되어 있다. 그걸 이쁜 텍스트 박스와 배경, 형이상학적 단어, 세련된 화살표로 열심히 표현해 봤자, 보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이해 할 수 없다. 마치 부적 위 휘갈겨 써 읽을 수 없는 붉은 글자와 그림처럼 말이다. 똑같지 않은가. 역시 무속의 국가답다.


PPT는 누군가를 안심시키고 환상을 심어줄 뿐.

21세기의 부적이나 다름 없다.

PPT 사용을 금지하라.



추가.

지난 PPT 관련 글에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https://brunch.co.kr/@dontgiveu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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