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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Feb 28. 2024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지혜

포드v페라리



포드v페라리

자동차에 미친 두 남자가 레이싱카를 직접 만들어 르망24에 출전, 우승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몰입감이 크고, 연출이 쫀쫀하며, 배우들의 연기가 일품이다. 크리스찬 베일과 맷 데이먼이 주인공인데, 말 다했지. 박진감 넘치는 레이싱 장면 등은 웰메이드로 손색이 없다. 레이싱 영화의 진수 그 자체.


여러 번 반복해서 관람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데, 영화 내용 중 볼 때마다 불편한 장면이 있다.


바로, 포드의 고위 임원이 실무자들을 괴롭히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 직장에서 일하며 겪었던 상황들이 떠올라서겠지. 아주아주 경미한 트라우마가 아닐까.


여기, 자동차에 미친 두 남자가 있습니다!

(’출발 비디오여행‘ 영화 대 영화 코너에서 김경식 씨가 이렇게 멘트를 시작하곤 했다.)


수만 시간의 경주에 참가하며 차에 대해 빠삭한 사람(크리스찬 베일)과 경주용 차를 전문적으로 설계하고 만드는 사람(맷 데이먼), 이렇게 두 남자가 뭉쳤다. 나는 영화 속 그들을 진짜 '엔지니어'라고 보았다. 그것도 '유능한' 엔지니어. '엔지니어'라는 단어는 들을 때마다 설렌다. 훌륭한 엔지니어는 '예술가'와 다를 바 없다고 보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 창작가의 직관과 열정, 재능을 느끼는 일은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IT일을 하고 있지만, 유능한 엔지니어를 실제로 본 적은 손에 꼽는다. 하지만 일단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두근두근 설렌다. 정신이 고양되는 경험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판타지에 가깝다.


이들이 진짜 차를 만드는 실무자들이다.


주인공들은 포드의 투자를 받아 차를 만든다. 포드의 이름을 걸고 레이싱에 참가해 달릴 차다.

엔지니어들이 열심히 차를 만드는데, 포드의 고위 임원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감 놔라 배 놔라 레이싱 카를 만드는 과정을 마이크로매니징 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레이싱 카 관련 실무적인 내용은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 사진 가장 앞에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부사장. 회사에서 만났던 누군가 떠오른다.


이건 마치 실무와 임원의 싸움.


결국 실무진들은 임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레이싱을 성공시킨다. 임원은 마치 자기가 해 낸 것처럼 군다.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 내내 방해만 해대던 임원이 각종 매스컴에 등장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도움이라곤 1도 안 준 인간이 말이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 아닌가?

구체적인 업무 내용은 전혀 모르는 임원의 방해와 그걸 어떻게든 극복해 일을 해내야 하는 실무진의 고난. 그리고 마치 자기가 일을 해낸 것처럼 보고하고, 성과를 뽐내는, 창피함을 모르는 임원의 추태까지.


완벽하다.

회사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일어나는 일이다.



얼마 전, 한 서비스에 대한 임원 리뷰가 있었다. 나는 관계자 중 한 명으로 우연히 참관했다.

그 자리에서 임원은 설명 중인 담당 PM의 진행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잠깐, 버튼이 맘에 안 드네."

"어떤 부분이 어떻게 맘에 안 드시는지?"

"그냥 뭔가 맘에 안 드는데, 바꿔서 가져오세요."

"네..."


"저 플로우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인증과정 다 제거하세요."

"법적 요건 충족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저 부분을 제거하면 데이터 정합성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장기적인 방향도 저희가 생각을.."

"불편하잖아요~ 빼라니까?“

"네..."




영화 끝무렵 맷 데이먼의 대사가 인상 깊다.

'고작 한 시간 운전해 본 걸로 뭘 안다고?!!'

분노가 느껴진다


새로운 조직에 임원으로 임명받고, 몇 가지 브리핑 받자마자 갑자기 모든 걸 다 아는 양 구는 낙하산 임원들이 많다. 겸손의 낮은 자세는 온 데 간 데 없다. 고작 몇 시간 업무 설명 듣고, 갑자기 전문가가 된 양 How-To를 지시하기 시작한다. 마치 잘 안다는 듯.


존 맥스웰의 'The 5 Levels of Leadership'이라는 책에 아래와 같은 귀중한 내용이 나온다. 낙하산 리더들은 제발 제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the 5 levels of leadership'  -john c. maxwell 중에서.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지 비전만 알려주세요.

('르망 24에서 우승한다.' 같은 멋진 비전이면 충분합니다.)

실무는 잘 모르시잖아요.

실무자들에게 권한을 주세요.

뒤로 빠져서, 실무자들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 주세요.



위임과 책임

프로젝트는 이게 전부다.

이 두 가지 원칙이 서로를 지원하며 맞물려 일을 만들어 나간다.


팀워크도 위임과 책임으로 만들어진다.

이 두 가지 팀 구동의 원칙은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다.

협업을 위한 규칙이기도 하다.


일단 적절한 사람에게 위임했다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지원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팀원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 동기부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온다.


동기부여와 책임감은 같은 말이나 다름없다. 책임감 있는 직원은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하고 밤을 새워 문제를 해결한다.


적절한 위임과 그에 따른 책임이 선순환을 이루면, 프로덕트는 성공적으로 작동할 것이고, 리더십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리더는 그렇게 존경받을 수 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일일이 how-to를 지시하는 행동으로는 결코 리스펙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을 모아놓았다면,

결국 일은 올바르게 진행되니까.

실무진들을 믿고 위임해 주세요.


그러니,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합시다.



추가.

이 영화, '포드v페라리'는 팀원들과 문제를 해결하고, 미션을 성공시키는 방정식의 해답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 어려운 자동차 엔지니어링에서도 결국 '인간'이 핵심이라는 교훈도 전달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인간'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전부다.


엔지니어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IT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PM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냥 관람해도 재밌습니다.

생각난 김에 나도 한 번 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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