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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Feb 23. 2024

‘파묘’를 보다

무속신앙이 이렇게 힙해도 됩니까


나는 종교에 관심이 많다. 무교부터 기독교, 불교에 이르기까지 그 기원과 교리의 근원, 경전의 숨은 의미에 대해 관련된 책을 즐겨 읽곤 했다. 대학 때 이수한 전공과목보다, 교양이었던 ‘종교의 이해’ 수업이 더 기억에 남고 의미 있었다.


그런 나에게, 영화 ’사바하‘는 오컬트 영화로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제목인 ‘사바하’는 ‘뜻대로 이루어 주소서’ 라는 뜻의 불교 용어다. 주인공 박목사는 이정재가 기가 막히게 연기했다. 찰떡이다. 사이비 종교를 추적하는, 세속에 찌든, 유머감각 갖춘 목사라니. (물론, 슬픈 사연도 숨긴 입체적인 인물이다) 이보다 멋진 캐릭터가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박목사 캐릭터는 영화 한 편으로 마무리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다. ‘사바하 유니버스’로 세계관을 만들어서 시리즈물로 이어나가도 흥행했을 것 같다.


영화 '사바하'


‘사바하’의 세세한 디테일과 깊은 의미의 대사는 종교에 관심이 많은 나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곡성’ 같은 본격적인 공포 영화가 아니라, 신과 인간에 대한 철학 영화에 가까웠다. 훌륭하지 않은가, 신을 논하는 대중상업 공포영화라니.


신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박목사가 영화 엔딩에서 나직이 읊는 대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나오기 힘든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문장 자체의 힘이 엄청날뿐더러, 이정재 배우의 목소리로 연기했기에 그 전달력이 배가되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원망과 애절함이 잘 느껴진다. 그 대사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려봤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그렇게 울고만 계시나이까
깨어나소서
저희의 울음과 탄식을 들어주소서
일어나소서
당신의 인자함으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시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영화 ‘사바하’ 중에서


서두가 길었다. 그런 '사바하'를 만든 장재현 감독이 5년 만에 신작 영화와 함께 돌아왔다. '파묘'. 안 볼 수 없다. 이런 뛰어난 감독의 영화를 놓치는 건 옳지 않다. 개봉일에 달려가 관람했다.


상영관 앞 포스터


퇴근 후 메가박스를 홀로 찾았다.

영화 시작 전까지 설레는 마음에 많이 긴장했다. 극장 좌석에 앉아 이렇게 두근두근한 건 정말 오랜만이다.

상영 전, 광고가 길다


영화가 시작됐다.

오프닝 시퀀스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난다. 세련된 화면과 음악이다. 예의 그 '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사운드를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 '묘'를 그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섬찟하고 음산한 기운을 화면에 욱여넣는 데 성공했다.


영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테니 말할 수 없고.


미쳤다.

이토록 힙한 오컬트 영화라니.


그저 미쳤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건 마치 퇴마록 같았다. (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퇴마록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 흥분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니면 퇴마 어벤저스 라고 하면 될까?


도대체 장재현 감독은 어떻게 이런 각본을 썼는가. 얼마나 깊고 오랜 조사와 취재를 했는가. 그는 ‘곡성’과는 다른, 그대로 직진하여 이해하기 쉽지만, 가볍지 않게 재미있는 오컬트 영화를 만들어냈다. 2시간 동안 관객을 서서히 압박하며, 단 한 번도 긴장이 헐거워지지 않게 하는 마법. 관객은 그저 롤러코스터를 타듯, 가만히 앉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사운드. 사운드가 훌륭하다. 빤한 공포영화처럼 쿵쿵거리지 않지만 극 전체에 으스스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굿판의 소란스러운 연주와 김고은 무당이 경을 읽는 소리는 들으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하고 기묘하다. 하지만 어쩐지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주문의 힘인 걸까. 굿에 쓰이는 음악인 ‘무악’. 무악이 영화 속 굿판에 펼쳐지며 대금, 장구,북, 징 등이 울려퍼진다. 영화 내내 무악과 경문을 읽는 노래와 목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마치 영화 전체가 하나의 큰 굿판같다. ’소리‘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모두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최민식 배우를 보며 느낀 건, 우리나라도 테이큰처럼 중년 이후 노년의 배우도 액션을 소화하고, 히어로 역할을 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것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꼰대나 아재가 아닌 '어른'으로서의 지관 역할을 멋지게 해 냈다.


특히 김고은 배우, 초반 대살굿부터 중간중간 여러 의식을 치르는 장면들까지, 많은 연구를 한 티가 역력했다. 저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대살굿 장면에서는 작은 몸짓 하나하나도 디테일해서 많이 놀랐다. (단순히 방방뛰는 연기가 아님) 한예종 출신 배우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요즘인데, 그중 김고은 배우는 단연 돋보인다.


계속 이야기하지만 자꾸 퇴마록이 생각난다. 풍수사, 장의사, 무당, 법사로 이루어진 팀이라니. 아니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완벽한 팀플레이인가. 흡사 어벤저스를 보는 느낌이다. 미신이라고 치부했던 토속신앙이 이렇게 힙하게 느껴질 줄이야. 심지어 소금 뿌리는 장면도 멋지다. 무속 어벤저스로 시리즈 제작이 필요하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았다. 자료조사와 고증을 통해 쓴 듯한 시나라오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이야기가 다했다. 몰입은 바로, '이야기'에서 나왔다. 거기에 명배우들의 신들린 연기가 추가되니 명작이 탄생했다.


역사에서 풀지 못한 우리의 한과 무속신앙은 알고 보면 한 줄기가 아닐까. 민족의 한, 그 자체가 토속신앙이 되어버린 슬픈 역사.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현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민족의 아픔은 누적된 채, 영원히 이 땅 위에서 눈물 흘릴지 모른다.


장재현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기대되는 감독과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파묘’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스포일러가 될까 봐 이만. 영화 본 분들과 모여서 이야기라도 나눠봐야겠다. 아무튼, '파묘' 재미있네요. ‘이런’ 류의 영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관람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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