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 때가 있다. 그냥 무작정 가보고 싶을 때. 아무 이유 없이, 문득 ‘가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중학교 때였나, 밤에 공부하다가 갑자기 ‘뒷 산에 가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뒷산을 혼자 올랐을 때도 그랬지. (대체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오늘도 문득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닝에 운동화를 주워 신고, 그냥 나와서 일단 버스를 탔다.
이장우 국밥이라고 불리는 호석촌에 가보자.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076/0004092573
한 시간쯤 걸리는데, 좀 먼가? 일단 버스에 탔으니 속 편하게 간다. 버스에서 내다본 밤거리가 한적하다. 아직 겨울인가 보다.
버스 내렸더니 롯데타워가 보인다.
저 건물은 언제 봐도 흉물스럽다.
도착했다. 얼핏 중화요릿집 같기도 하고.
앞에 2팀 대기 중. 무작정 줄 서는 게 아니라 이런 대기 시스템이 있어서 좋다.
주차 때문에 민원이 많은가 보다.
가게 앞에 절이 있는데, 큰 불상이 놓여있다.
은은한 미소가 아름답다.
마음이 경건해진다.
입장했다. 한 10분 기다린 듯.
실내는 이렇다. 레트로풍의 노포 컨셉인 듯하다.
밑반찬이 바로 나온다. 순댓국밥이나 장터국밥이나 이 정도 구성이 기본으로 보인다. 여기에 김치가 있고 없고 정도 차이.
물은 보리차. 진하고 느끼한 국물과 보리차는 잘 어울린다. 이런 디테일에서 정성이 느껴진다.
나왔다. 딱 봐도 양이 어마어마하다. 내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어. 근데 좀 하얗다. 좀 더 매콤한 걸 기대했는데?
오호 찾았다.
국물 안에 다진 양념이 들어있다.
다진 양념을 풀어주니 이제야 그럴듯하다. 국물이 살짝 매콤하다. 간을 따로 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적당히 맵고 짜다. 16시간을 끓인 국물이라는데, 과연 진하고 깊다. 딱 내가 좋아하는 비주얼이다.
고기가 듬뿍 들어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특이한 건, 고기가 좀 잘게(?) 저민 듯 나온다. 이건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큰 고기를 입에 넣고 식감을 맛보고 싶다면 좀 아쉬울 수도.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먹기 편하고, 오히려 고기가 더 많은 느낌이 들었다.
순대는 당면순대. 피순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 많던데, 나는 개의치 않았다. 쫄깃쫄깃 맛있으면 됨.
배운 대로. 밥은 반만 만다.
먹음직스럽다. 역시 밥은 조금씩 말아먹어야 한다.
이 소스는 뭘까. 액젓 같기도 하고 느억맘 뭐 그런 건가.
고추가 들어가 있고, 새콤 짭짤하다. 한국의 맛은 아닌 듯.
순대를 찍어먹어 보니 색다르다.
깍두기는 치킨무맛이다. 순댓국집엔 유독 이런 류의 깍두기가 많은 듯. 국밥 한 숟갈에 깍두기 하나. 이 조합을 어떤 음식이 이길 수 있을까.
쿰쿰하지 않고 담백하다. 근데 진하다. 와, 근데 먹다 보니 생각보다 조금 더 맵다.(저는 맵찔이 입니다.) 맛있어서 계속 들어간다. 양이 많다. 신의주에 비하면 1.5배는 되는 것 같다.
다 먹었다. 다시 말하지만 양이 정말 많다. 굳이 특을 주문할 필요는 없겠다. 배가 많이많이 부르다.
밖으로 나왔더니 날씨가 적당히 선선하다.
배부를 땐 움직여줘야 한다.
집까지 걸어가 보자.
네이버맵으로 찍어보니 2시간 20분 나오네.
가보지 뭐.
한적한 도로를 걷는다.
서울도 은근히 걷기 좋은 도시다.
걷다 보니 다리가 나왔다.
차들이 씽씽 달리지만 인도가 잘 되어있다.
건넌다.
하천이 고즈넉하다.
서울에 좋은 곳 많구나.
한참 동안 조용한 강을 내려다본다.
집에 도착했다.
두 시간 걸었다.
힘들다. 다음부턴 차 타고 와야지.
이장우 씨는 배우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맛있고 깊은 순댓국을 만들어 팔 줄은 몰랐다. 그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 깊다.
이장우는
"나는 좋은 차 이런 거 아무것도 필요 없고, 옷도 신경 안 쓴다. 오로지 음식. 내가 대접하고 만들어 먹는 것, 내가 개발하는 것에 대한 행복이 너무 크다"라며 가게를 차리게 된 이유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 바로 이런 게 섹시한 거다. 근육 키우고, 비싼 옷 입고, 수입차 타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장인정신을 갖춘 태도와 행동이 멋지고 섹시한 거지.
많이 배웠습니다. 이장우 배우님. 아니 요리사님.
덕분에 오늘도 잘 먹고 잘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