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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Jun 27. 2021

부러졌지만 풀업을 하고 싶어요 2

"팔을 좀 다쳤어요."

(나는 끝까지 ‘부러졌다’는 단어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어떻게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부딪혔습니다."

"언제요?"

"방금이요, 1시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럼 잠시 대기해주세요."


응급실은 인산인해다. 아기들 우는 소리, 힘없이 앉아계신 어르신들, 눈코뜰새 없이 바빠보이는 간호사분들.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다치거나, 갑자기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기다렸다. 대기실 의자는 좁고 딱딱하다. 대기자가 많은가보다. 한참을 기다렸다. 1시간쯤 기다렸을까. 어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려보이지 않는 의사 한 분이 다가왔다.

"팔 다치셨다고, 어디 좀 볼까요?"

"아 네네, 떨어지면서 부딪혔는데,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요. 이거 보시면 조금씩 움직이고, 붓지도 않았네요. 부러진거 아니겠죠? 인대가 조금 늘어난거겠죠?"

나는 부러지지 않았기를 바라는 주문을 외는 듯, 의사에게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일단 찍어보시죠."

엑스레이를 찍고, 또 뭘 찍었다. (기억이 안난다, CT였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찍는데 또 1시간을 기다렸다. 찍고 다시 의사를 만나는데 1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 괜찮다. 이렇게 아픈 사람은 많은데 의사,간호사는 한정돼 있으니, 기다리는게 당연하다. 그들도 힘들꺼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역시 인대가 늘어난건가요?"

"......"

지금 생각하면, 의사가 나를 보면서 얼마나 어이없어 했을지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의사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떠들어댔는지. 아마 제발 부러지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다. 누가 옆에 있었으면 제지라도 해줬으련만.


"여기 보시면 이쪽이 부러진 것 같구요."

의사가 모니터에 띄워진 사진을 보며 설명했다. 사진, 내 뼈, 뭔가 조금 어긋나있다.

"이쪽, 자 여기 보이시죠?"

의사가 내 왼팔을 잡고, 팔꿈치를 잡는다. 살짝 움직이자 덜그럭덜그럭 움직인다.

"이게 부러진겁니다."

그렇구나. 부러졌구나. 내 기도는 소용이 없었구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깁스를 하겠구나, 회사는 어떻게하지, 집안일도 못하겠네, 씻을 수는 있을까, 설마 수술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래, 수술까지는 아닐꺼야.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 깁스 정도는 좋은 경험이 될꺼야! 그럼그럼!


"당장 수술해야 하구요."

의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술이란 단어를 내 얼굴에 던졌다. 그렇구나, 내 기도는 전혀 소용이 없었구나.

사는데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뜻대로 된다면 운이 좋은 것일 뿐. 그냥 우연인거다. 신이 인간을 가장 어이없게 생각하는게, "이것들 봐라, 계획을 세우네?" 라는 거라 하지 않던가. 계획은 계획이고 희망은 희망이다. 생각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게 인간 세상이다. 이번 일도 결국 팔은 부러졌고, 나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된거다.' 여기에 운이 없네, 재수가 없네 그럴 것 하나 없다. 그냥, 그런 일이 벌어진거다.


"여기서 수술 가능한건가요?"

"지금 저희 병원에서 받으시려면 일주일 정도 대기하셔야 하구요. 다른 병원을 알아보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수술은 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오래 방치하면 좋지는 않을꺼에요."

"네, 잠깐 전화좀."

나는 아내와 통화했다. 아내는 망연자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항상 의연하다. 그리고 행동이 빠르고 영리하다. 즉시 아는 인맥을 총 동원해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냈다. 오늘 당장은 안되고 월요일에 입원하면 수술할 수 있다고 한다. 아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다른 곳에서 수술 받겠습니다. 찍은 사진이랑 파일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임시 깁스로 조치를 받고, 사진 파일이 든 CD를 들고, 몇가지 약봉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나는 결제를 위해 수납창구로 갔다. 수납창구가 또 인산인해다. 오늘은 사람이 많구나. 돈을 내기 위해서도 기다려야 한다. 이건 어떻게 자동화가 안될까? SMS를 사용하면 간편결제나 송금이 가능할 것 같은데? 키오스크는? 여기서 갑자기 직업병이 도졌다. 내가 미쳤지. 30분을 넘게 기다려서 겨우 결제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오늘 오전까지 평화롭고 따뜻한 토요일이었는데. 불과 몇 시간만에 나는 부러진 팔을 붙잡은 채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 돌아오는 택시 차창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구나. 비가 내리는구나.

아, 우산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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