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가 있다. O라고 부르겠다. 이 친구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나는 O를 만나고 많이 달라졌다. 이 친구로부터 좀 더 멋지고 세련되게 일하는 법에 대해 배웠고, 일 외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문화에 열려있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고마운 친구다. 무심한 듯 쿨한 태도가 가끔 시니컬할 때도 있지만, 나에게 부족한 면이라 호기심 있게 바라보며 그 태도를 적당히 배우려고 한다.
O는 옷을 고를 때 텍스쳐와 감촉을 꼼꼼히 따지는 등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면서도, 남자는 모름지기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며 가죽지갑에 현금을 권종별로 챙겨 가지고 다니기도 하는, 다양한 면을 가진 친구다.
O와 나는 근처 동네에 살아서 가끔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때마다 나는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
늘 그런 것처럼, O로부터 툭 하고 던지듯 연락이 왔다.
좋지. ‘시장’에 가보자.
너에게 소개해 줄 집이 있어.
나는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종종 갔었는데, 요새 젊은 분들은 엄마와 '마트'에 주로 갔을 테지. 그만큼 '시장'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공간이 되고 있다. 애써 시장 상권을 살려보려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것 같은데 쉽지 않아 보인다. '시장'특유의 정돈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는 이제 서서히 사라져 간다.
강남 한복판에도 시장이 있다. 바로 논현역 근처 '영동시장'이다. 여기는 반찬가게도 있고, 떡집도 있고, 생선가게도 있는 진짜 시장이다. 강남에 이런 시장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왠지 안타깝기도 하다. 이 영동시장 안에 오래된 순댓국집이 하나 있다. 바로 '현대순대국'. O에게 소개해줄 집이 바로 여기다.
O는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시간 약속을 어기지 않는 친구다. 내가 그래서 이 친구를 좋아한다.
바로 입장했다. 다행히 저녁시간 보다 살짝 앞서 도착한 덕분에 대기는 없었다.
실내 분위기는 이렇다. 역사가 느껴지는 노포 그 자체다.
노포 분위기와 별개로, 주문 시스템은 최신 문물이 들어와 있다.
바로, 키오스크 방식이다.(무인주문시스템)
밑반찬부터 빛의 속도로 세팅된다.
김치, 깍두기에 고추와 마늘.
매콤한 새우젓과 쌈장.
나왔다.
국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팔팔 끓는다.
벌써 맛있다.
국물은 맑고 가볍다. 오히려 설렁탕에 가깝다. 깔끔하고 고소한 국물이다. 아니, 이건 ‘꼬소하다’고 표현해야겠다. 맞춤법 틀려도 어쩔 수 없다. ‘고소하다’로는 와닿지 않는다.
꼬소한 국물이 약간 꼬릿하고 끈적하다. 조금 싱거워서 소금 간을 했다.
건더기가 가득하다.
순대는 당면순대
이런 부속 고기들이 가득하다. 먹어보면 고기가 정말 쫄깃쫄깃 그 자체다.
순대를 하나 꺼내서 새우젓 그릇에 올리고,
새우젓을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올려 순대 위에 살포시 얹는 과정을
마치 반도체 공정의 정밀작업처럼 정성 들여 진행한다. 서양음식의 나이프와 포크로는 불가능한 동작. 나는 이 과정을 좋아한다.
그리고 함께 집어 올려 입에 넣으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된장 조금 올리고 그 위에 마늘. 이렇게 작업 및 제조해서 먹어도 맛있지. 기름진 순대와 알싸한 마늘의 조합은 옳다.
곱창도 들어있네.
밥을 말았다. 정말 설렁탕 같다. 국밥을 여기저기서 먹어보며 느낀 점은 ‘밥이 맛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밥의 완성은 ‘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물이 그럴듯해도 밥 상태가 안 좋으면 국물이 힘을 내지 못한다. 사람도 그렇잖은가. 외모로 반짝 호기심을 자극할 순 있겠지만, 결국은 태도와 성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진짜 친구는 그렇게 찾는다. 좋은 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김치도 올려서 먹는다.
새콤보다는 매콤 쪽 김치다.
깍두기도 빼놓을 수 없지. 이 집은 새콤달콤 쪽은 아니다.
사서 내놓는 중국산 김치깍두기는 아닌 것 같다.
직접 담그는 느낌. 아님 말고.
옆자리 어르신이 갑자기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시더니, "매콤하게 먹어야지 제대로 먹는거야~!"라고 일갈하셨다. 그렇지, 도전해 볼 만하다. 어르신 말씀에 따라본다. 다대기를 넣었다.
매콤해지게 풀어보자.
오 근데 맛있다. 텁텁한 매운맛이 아니라, 칼칼한 매운맛이다.
절반은 안 맵게 먹고, 절반은 매콤하게 먹는다. 이건 마치 짬짜면.
다진 양념 넣길 잘했다. 어르신 말씀은 늘 도움이 된다.
다 먹었다.
(O도 국물까지 싹 비웠다. 이럴 때 나는 참 뿌듯하다.)
시장 안 꽈배기집에서 꽈배기를 사들고 근처 커피집에 왔다.
O와 함께 후식으로 꽈배기와 커피를 즐기며 이런저런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부터 패션, 예술에 이르기까지. 가보지 못한 넓고 넓은 세상에 대해 낄낄대며 떠들었다. (우리는 늘 낄낄댄다.)
전통 시장 오래된 노포에서 순대국밥을 먹고, 제냐의 올해 F/W를 논하고 있노라니 이보다 힙할 수 있을까 싶다. 나는 패션에 해박한 O와의 대화가 항상 즐겁다. 하지만 O, 미안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오늘 입은 옷이 가진 옷의 전부야. 다음에도 같은 옷을 입은 나를 만나게 될 거야. 이해해 주라.
오랜 전통과 최신 트렌드, 클래식과 컨템포러리, 우리는 늘 그 사이 어딘가에서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 격식 없는 자유가 좋다. O와 오래오래 대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랑 어울려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