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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Apr 20. 2024

서일순대국, 순댓국으로 건물을 올렸다고?!


퇴근하고, 보라매역에 왔다. 국밥 먹으러.


요새는 혼자 이렇게 맛집 찾아다니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다. 허영만 아저씨나 최불암 아저씨 느낌으로다가.


오늘의 맛집은 ‘서일순대국’


맞은편에 분점까지 있다. 순댓국으로 돈 벌어서 건물을 올렸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어디로 갈까 하다가 오래된 쪽으로 들어갔다. 같은 가게고 음식맛도 똑같겠지만 아무래도 역사가 있는 쪽이 믿음직스럽지.


저녁시간인데 대기는 없다. 실내가 넓어서 한 번에 많은 인원을 소화해서 그런 듯하다.

넓다


밑반찬. 국밥에는 김치가 중요하다. 여긴 겉절이에 가까운 느낌이다. 나는 덜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데, 여기 김치 맛집이네. 근데 기름진 순댓국에는 익은 김치가 더 어울리는 거 아닌가.


순댓국 나왔다.


뽀얗다. 국물이 진하다. 설렁탕보다 두 걸음 더 진한 맛. 현대순대국보다도 깊다. 간이 조금 덜되어 있다. 소금 후추로 간을 맞췄다. 즐거운 나트륨 파티.

꼬소한 국물


건더기가 많다.


뜨겁다. 순대와 고기를 앞접시에 덜어놓고 식혀준다.


응? 순대 속에 시래기가 들어있다.  재밌다. 독특하네. 순대와 시래기라. 여기서 호불호가 좀 갈릴 듯한데. 일단 먹어보자.


새우젓 올려서 먹고.


양파도 올려서 먹고.


고기를 꽤 많이 건져먹었는데 아직도 많다.


고소한 맛을 즐겼으니, 매콤하게도 먹어보자. 다대기를 넣어야겠다. 한 번 넣으면 다시 하얀 국물로 돌이킬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 인생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


진지하게 적정량을 고민했다. 이윽고 국물에 다대기 투하.

얼큰하게


밥도 말았다.


김치를 얹어서 먹는다. 다시 생각해도 겉절이는 흰쌀밥 그대로와 더 어울린다. 국밥에는 좀 별론데.


매콤한 정도가 좀 아쉽다. 다대기를 조금 더 넣었다. 빨갛게 됐다. 나는 왜 자꾸 매운 양념을 넣는 걸까.

이제 좀 매콤하겠군


얼큰하고 좋다.


다 먹었다.

완료


일단 기대가 너무 컸다. 여기저기 방송에도 나오고, 서울 3대 순댓국이라고 들어서 그랬나 보다. (대체 그런 순위는 누가 정하는 건지)


개인적으론,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맛있는 순댓국이!?‘ 급은 아니다.


일단 국물에도 들어있고, 순대에도 들어있는 시래기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게 컸다. 시래기 특유의 그 냄새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시래기 때문에 다대기를 듬뿍 넣어봤지만, 매운 양념으로도 향은 어쩔 수 없더라. ’3일한우국밥‘의 매콤한 장터국밥에 들어있는 시래기는 참 맛있었는데. 하얀 국물의 순댓국과 시래기는 상성이 좋지 않다.


오며 가며 우연히 근처를 지난다면, 어쩌다 한 번 맛볼 만하다. 굳이 찾아갈 이유는 없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에 오다가 강남 교보문고에 들렀다. 여기는 올 때마다 편안하다. 예전에 ’코즈니‘라는 라이프스타일샵이 있었는데, 그 시절 분위기와 비슷하다. 거기 매장 음악이 좋았지.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너무 옛날 얘긴가.

강남 교보문고


지하 음반가게에 클래식 코너가 따로 크게 있다. 좀 둘러보자.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스타, 글렌 굴드 음반이 있다. 글렌 굴드의 강박적인 성격이 나는 마음에 들더라.

글렌 굴드


요새 올라프손 이 분이 내 유튜브 추천에 많이 떠서 종종 들었는데, 유명하신 분인가 보다. ‘아이슬란드의 글렌 굴드’라니 별명 한번 멋지구나. 이 분도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내셨단다. (바흐는 영원히 사랑받을 듯) 집에 갈 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야겠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박사가 즐겨 들었던 바로 그 음악.


쇼펜하우어는 여전히 인기다.


인간의 불행 중 상당수는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을 엮은 책,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 나오는 문장이다. 멋지지 않은가? '혼자 잘 지내는 것',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되새겨야 하는 글귀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훌륭해지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부양을 위한 도구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중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 '자립'. 나에게 중요한 화두.

위 책의 글귀 속,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 참 쉬운 문장이지만, 생각보다 실행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리더십에 대해 고민하고 글도 쓰고 있지만, 정작 '자립'이라는 '나 스스로에 대한 리더십'에 관한 부분은 아직 많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이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자립'에 대해 고민하다니. 인생은 참 어렵고 복잡하다. 국밥을 먹고 서점에 들러서 궁상맞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건 국밥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일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우리, 각자의 삶을 잘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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