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넷플릭스 '삼체'를 먼저 보았다. 보면서 적잖이 놀랐는데, 영상 속 그 기발한 상상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원작 소설이 있었다.
그렇다면 원작을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찾아봤다. 무려 3권짜리 소설이더라. 1권 452쪽, 2권 716쪽, 3권 804쪽으로 전체 1,972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 이렇게 규모가 큰 글은 왠지 선뜻 손대기 어렵잖은가. 그래서 주저주저하던 차에, 얼마 전 만난 후배 J가 이야기했다.
"삼체는 무조건 읽어야죠."
언제나 믿는 J의 추천.
나는 즉시 읽기 시작했다. 3권 전체를 2주 정도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재미있고, 몰입도가 높다. '삼체'를 읽으며, 그 웅장한 스케일과 시간의 거대함에 압도당했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랙의 우주관은 어린이 동화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하드코어 SF? 성인용 SF? 다양한 과학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탄탄한 논리 위에 쓰인 소설이다. 하나의 거대한 과학 논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아니, 나는 오히려 종교철학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나는 그런 장르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느냐? 천만의 말씀. 최근 들어 이렇게 몰입력 있는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다. 이런 작가를 가진 중국이 부러울 지경이다.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토록 위대한 작가라니.
소설은,
우주라는 거대한 암흙의 숲 속, 창백한 푸른 점 위의 인류들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지금 이 순간,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담론은 무엇인가.
인간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가
이 넓은 우주에 우리뿐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고작 3차원의 세계에 살면서 마치 우주를 정복한 듯한, 인류의 무례하고 거만한 태도는 대체 어떻게 교정되어야 하는가.
겨우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 인간은 왜 그토록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가.
스타트렉, 스타워즈는 애들 동화로 만들어버리는 가공할 스케일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설은 나에게 다시 한번 창백한 푸른 점의 사소함에 대해 일깨워주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잔인한 자기 객관화.
겸손함을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깊이 느끼고 반성했다.
소명을 가진 자
면벽자에서 검잡이로 이어지는 뤄지의 인생을 바라보며 '소명을 가진 자'가 가진 위대한 힘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과연 소명을 가졌는가? 무엇을 위한 삶을 이어가는가. 그저 먹고살기만을 바란다면 그건 벌레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고작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가? 뤄지와 같은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전체적으로
1권~2권의 내용과 3권의 내용은 살짝 결이 다르다. 아니 스케일이 다르다. 마치 영화 '파묘'의 전/후반부 처럼 다른 이야기로 느껴진다. 3권부터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과하다 싶은 설정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동안 내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사소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SF장르를 좋아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넷플릭스에서 삼체 시즌 2 제작을 공식 발표했다던데, 대체 어떻게 소설 속 내용을 그려낼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어쩌면 텍스트로 남겨놓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환영. 영상화된 삼체 세계의 모습이 궁금하다.
혹시 인간보다 고차원의 존재가 지금 인간 세계를 내려다본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가 개미를 바라보는 듯한 감정일까.
아니, '생각'이나 '감정' 자체도 너무나 인간적인 저차원의 지각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요즘.
나는 언제나 궁금하다.
3차원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으며, 영화 '사바하'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그렇게 울고만 계시나이까
깨어나소서
저희의 울음과 탄식을 들어주소서
일어나소서
당신의 인자함으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시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대체, 어디 계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