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 이라는 불교의 대승경전이 있다. 쉽게 불경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붓다가 설파한 법의 의미를 대승 불교 교리 기반에서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설산동자 반게살신(雪山童子 半偈殺身) 대목이 있다.
붓다가 '설산동자'라는 이름으로 설산(히말라야) 에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런 말이 들려왔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은 무상하나니, 이것이 곧 생멸의 법칙이다.)
붓다는 크게 감동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의 문장이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말을 했다면 분명 크게 깨달은 스승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나찰'(악귀)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나찰이 그런 고귀한 문장을 말 할리가 없을 텐데?
붓다는 나찰에게 물었다.
"방금 '제행무상 시생멸법' 이라는 문장을 읊은 것이 그대요?"
"그렇소"
"그건 반쪽짜리 문장이고 뒷부분이 더 있을 것 같은데, 나머지 구절도 마저 알려주시오"
"알려주고 싶지만, 내가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말할 수 없소. 당신의 뜨거운 피를 준다면 알려드리리다"
붓다는 생각했다.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그것'이라고.
진리를 알 수 있다면 육체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나찰에게 말했다.
"알겠소. 내 몸을 줄 테니, 나머지 구절을 마저 들려주시오"
이윽고 나찰은 조용히 읊조렸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생멸이 끝나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 그것이 최고의 낙(樂).)
붓다는 감동했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
붓다는 약속대로 목숨을 바치기 위해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때, 나찰의 모습은 인드라(제석천)로 변했다.
인드라는 떨어지는 붓다를 살포시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여러 신들이 모여 붓다의 발에 절을 올렸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의 위대한 의지에 찬탄을 바쳤다.
흔히 '인생무상'이라고 외치며, 한 번뿐인 인생 별거 없으니 그저 즐기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때 광풍처럼 쓸고 지나간 '욜로'가 그 비슷하게 해석되어 많은 폐인들을 낳았다. 혹은 '인생무상'을 '허무주의'로 해석하며 우울하고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지향하게끔 유도, 자포자기하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다.
'무상'(無常)에서 상(常)은 항상'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무상(無常)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별거 없으니 대충 즐기며 살라'는 뜻이 아니다. 무의미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육체는 늙고 병든다.
인간은 모두 죽어서 우주의 원자로 분해되어 돌아간다.
그것이 우주의 진리이며 자연의 섭리이다.
다시 한번 써본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은 무상하나니, 이것이 곧 생멸의 법칙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생멸이 끝나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 그것이 최고의 낙(樂).
당신은 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가?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이 지금 가진 그것들도 결국 멸한다.
그것이 생명이든 재산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집착해 봤자 소용없고, 고통만 커질 뿐이다.
갖지 못했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잃어버려도 슬퍼하지 말라.
우리가 살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정의롭게 살며, 최선을 다해 주변에 선을 베풀면 된다.
부처님은 그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던가.
소중한 진리를 잊지 않도록 하자.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