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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학과 가면 잘 나간다더라… 누가 그래?

by 이서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너무 오래 전이군.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수십 년 전에는 딱히 진로상담이랄 게 없었다. 각자 대충 상상한 미래의 모습을 꿈꾸며 학과를 선택했다.


인터넷이 없었으니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책, 영화, 뉴스, 입소문, 부모님의 충고 등이 전부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뜨는 직업’을 TV나 책, 신문, 단순한 풍문 등을 통해 접했다.


지금이야 믿기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건축과가 인기였다. 건축 관련 전공을 마치고, 대형 건설회사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미래가 보장되었다. 연봉도 높고, ‘건축’이라는 어찌 보면 예술적이고 창작에 가까운 일을 하리라는 기대도 컸다.


내 진로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바로 TV 드라마였다. KBS에서 방영한 '내일은 사랑'.


지금은 글로벌 스타가 된 이병헌 씨가 주인공 대학생 '신범수'역할이었는데, 그의 전공이 바로 '건축과'였다. 나는 그 드라마를 좋아했다. 제도통을 매고, 건물모형을 들고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드라마 속 신범수의 모습에 반했다. 건축학도로서의 대학생활은 TV를 보던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환상으로 부풀어 올랐다.


건축은 당시에 그만큼 인기 있는 분야였다.

그래서, 나는 희망하는 진로로 ‘건축가’를 선택했다.

왜? 인기 있는 직업이니까. 누구나 원했으니까.

당시 내 진로 상담표


정말 그랬는지 증거를 확인해 볼까.

그 무렵에는 수능 배치표라는 게 있었는데, 성적에 따른 지원 가능 학교와 학과를 순위 매겨놓은 표다. 내가 수능을 보기 몇 해 전 배치표를 예로 한 번 보자. 나는 이런 배치표를 보며 고교 생활을 하고, 꿈을 키웠던 것이다.


무려 의예과에 이어 건축과가 서울대에서 입학점수가 두 번째로 높은 과였다. 아래쪽으로 살펴봐도 각 대학의 의예과를 제외하고는 건축공학, 건축과가 최상위를 차지했다. 물론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당시 건축과의 인기가 그 정도였다.


TV에서는 인기 건축가들이 예능에 나왔고, 많은 돈을 벌었다. 드라마 주인공 중에도 건축설계사들이 등장, 멋지게 여주인공을 사로잡았다. 나는 무지성으로 건축학과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쯧쯧. 한심하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소위 ‘뜨는 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내가 건축학과에 입학하고 몇 년 후.


IMF 사태가 터졌다.


건설회사들은 줄도산, 건축업계는 ‘망했다’고 할 정도로 주저앉았다. 당시 많은 선배들이 정리해고를 당했고, 이후로도 건축업계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다.

당시 기사



나는 아들을 위해 이 글을 썼다.

아들이 진로를 설정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할 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적어도 나와 같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도 많은 부모들이 소위 ‘뜨는 과’를 찾아 헤매고 다닌다. 핫한 인기과를 선택/입학까지 가이드해, 자녀에게 편하고 밝은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뭘 해야 할지,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부모가 선택해 주는 시대는 끝났다. 부모는 알지 못한다. 먼저 살았다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세상이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나온 후 그 속도는 수십 수백 배 빨라졌다. ‘특이점’이 오고 있다.


의예과가 지난 수십 년간 최고의 인기학과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까. 나는 미래에도 의사라는 직업이 남아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이런 시류에서 부모 말만 듣고 우르르 쫓아가면 결국 낭패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부모가 하란대로 다 했는데, 제 삶은 왜 이런 건지 모르겠어요 ㅠㅠ“라는 다큐멘터리 속 어떤 청년의 말은 안타깝고 슬프다.


대학 입학은 종점이 아닌,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부모와 자녀 모두 자각해야 한다.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에 입사하면 인생이 완료되는 것이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지난 수십 년간의 인생 방정식으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아들에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했다. 이렇게 말이다.


아빠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런데 도와줄게.
같이 고민하고 찾아보자.


더 많은 책을 읽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뮤지컬/발레/연극 등 각종 공연도 관람하고, 그림도 감상하고, 전시회에도 가보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기타도 치고, 게임도 하고, 여행도 하며 견문을 넓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는 어떨 때 행복한지 탐색해야 한다.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때때로 실패도 경험해야 한다. 실패가 쌓이면 내 취향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아들,

다가올 너의 세상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거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 그러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걸 도전해 보자.


요새 동아리 때문에 기타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응원한다.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멋지다. 음악도, 기타도, 밴드 동료들과의 합주도 너의 인생에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나저나 커버곡이 ‘드라우닝’ 이라며, 노래 좋더라. 덕분에 매일 듣고 있다.)


고민하고 찾을 수 있도록 아빠도 옆에서 도와줄게.

실패하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뭐 어때. 다시 해보면 되지.


네가 가는 길이 정답이야.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란 것만 알아둬.

늘 너를 믿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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