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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카와(장어덮밥), 흐트러짐 없는 그릇에서 느낀 철학

by 이서


도반 O가 신세계 강남점 '로로피아나' 매장 리뉴얼 구경을 간다고 해서 따라가 봤다. 그는 그 브랜드의 우수고객이다. 따로 연락이 와 초대받은 듯했다.



최근에 HBO의 TV시리즈 '석세션'을 재미있게 보고 있던 터라 더 관심이 갔다. 석세션에 나오는 인물들이 극 중에서 '로로피아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리뉴얼 한 매장은 '로로피아나' 다웠다. 나는 사치품을 좋아하지 않지만, 장인정신은 존경한다. 고급 원단을 스스로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로로피아나'는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만큼, 제품을 제작하고 관리하는 그들의 '장인정신'에 대해서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브랜드의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이 매장 리뉴얼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최종 완성도의 차이는 결국 디테일에서 드러나는 법. 구석구석 놓치는 디테일이 없는 점에 감탄했고, 그렇게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부러웠다.




O는 자주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 남에게 얻어먹는 걸 꺼려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앞뒤 재지 않고(전두엽을 꺼놓고) 편히 얻어먹는 친구가 O다. 나는 기껏해야 국밥정도 사는데 말이지. 그가 '장어덮밥 잘하는 집이 있다'며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래서 방문한 ’키쿠카와‘


일본에서 유명한 가게인데, 한국에 오픈한 유일한 매장이 여기란다. 규모가 크진 않다.


메뉴는 단출하다. 거기에서도 자부심이 느껴진다. ‘히츠마부시’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온 모습에서 놀랐다.

쟁반에 담긴 형태가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로피아나'부터 여기 '키쿠카와'까지. 오늘 내 뇌와 정신이 호강한다.

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라.


맛있게 먹는 법이 매뉴얼로 제공된다.

나는 매뉴얼을 사랑하는데, 여기 참 잘하네. 맛있게 먹는 방법 매뉴얼이라니.

시키는 대로 먹어보자.


젓가락은 일회용인데, 흔히 우리가 아는 나무젓가락과 다르다.

차별, 에서 오는 고집이 좋다.

장인정신은 보통 그런 부분에서 발현된다.


제공된 장어의 맵시와 빛깔이 곱다.


장어가 두툼하다.


무엇이든 기본이 가장 중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덮밥에서는 밥이 가장 중요하다.

고슬고슬 알맞다.


제공된 매뉴얼의 ‘두 번째’에서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숟가락 위에 올렸는데, O가 말했다.

“그건 세 번째 용인데.”

’토핑‘이 뭔지 헷갈렸다. 매뉴얼이 좀 더 구체적이면 좋겠다.

에이 아무렴 어떠랴. 맛있게 먹으면 된다.


세 번째 매뉴얼대로 했다.

다시마물을 말아놓으니 오차즈케 처럼 되었다.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었는데, 웬걸? 맛있다.


큰 숟가락(주걱이라고 불러야 하나)으로 조금씩 덜어서 먹으면 된다.


'스이모노'

자극적인 덮밥을 먹으며 중간중간 입을 헹구는 용도라고 한다.

그래서 간이 세지 않다.


매뉴얼 ‘세 번째’에서 시키는 대로 차에 말아먹는 게 가장 맛있었다.

나는 와사비를 좋아하는데, 와사비를 듬뿍 올려 입에 넣으니 고통스럽고 좋았다.


다 먹었다.

완료


'밥을 먹었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작품을 즐겼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경험이었다.


내가 그간 글에서 누차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간은 정서적으로 자극받는 경험을 하면 성장하게 되어 있다. 뇌의 퇴화를 막는 것은 물론이다. 그 자극은 책을 읽고 사색하는 행동으로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또한 뮤지컬, 음악회, 전시회 같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도 느낄 수 있으며, 여행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또 있다. 오늘처럼 장인정신을 가치로 삼는 브랜드의 매장을 구경하고 디테일을 느낀다거나,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을 즐기면서도 우리는 정서적으로 고양된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늘 좋은 경험을 선사해 주는 O에게 감사하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이서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회사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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