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에 깃든 사유의 힘
오랜만에 혼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요새 사람이 정말 많던데, 아무래도 박물관은 어느 정도 조용하고 한적한 게 조금 더 어울려 보인다.
(빨리 인기가 식었으면 좋겠다.)
낮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늦은 오후에 방문했다.
저 멀리 남산이 보이는 이 뷰가 좋다.
늦게 방문했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다.
낮에는 여기에 대기줄이 가득하다던데.
그럴 일인가 싶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서.
여기 보러 왔다.
'사유의 방'
이거만 보고 얼른 돌아가야 된다.
(저녁에 아들이랑 같이 PC방에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참 좋은 문장이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공간이다.
입장하면 이런 몽환적인 복도를 지나게 된다.
이 '사유의 방' 기획하신 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크게 칭찬을 해드리면 좋겠다.
복도 끝을 돌면, 이렇게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좁은 길 끝에 이렇게 탁 트인 공간으로 충격을 주는 구성을 좋아한다.
유럽의 골목 끝 만나는 거대한 광장과 성당처럼 말이다.
여기 '사유의 방'에는 딱 두 점의 유물만 있다.
바로 '반가사유상'이다.
국보라는 칭호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게 익숙하니. '78호'와 '83호'가 모셔져 있다.
이 넓은 공간을 저 작은 두 조각상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 존재감이 엄청나다. 위압적일 정도다.
내 글을 몇 번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이 불상을 매우 좋아해서 글 사이사이에 사진을 자주 넣었었다. 그리스의 그 어떤 대리석 조각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시대, 그러니까 6세기와 7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천 년이 넘었다. '반가사유'라는 것은 다리를 한쪽 올리고, 생각하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주조하는 과정도 매우 어려워서, 현대의 기술로도 저렇게 구현하기 힘들다고 한다. (유튜브에 관련 다큐멘터리가 올라와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아마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30명에서 50명 규모의 팀이 모여 오랜 기간 제작했으리라 추측한다.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오른손을 살짝 뺨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미소 짓고 있다.
"왔니?"라고 나에게 말 거는 것 같다.
78호는 좀 더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다.
83호의 옷이 흘러내리는 질감의 표현이 뛰어나다. 그래서 그런지 83호가 전체적으로 더 입체적이다. 유려하고 단아하다. 머리에 쓴 장식도 더 미니멀하다. 나는 83호를 더 좋아한다.
’온화한 ‘이라는 단어를 표정으로 만들면 딱 이거일까.
대체 무엇을 깨달은 거지.
뭔가 '초월한' 형상.
계속 보다 보면, 여성성이 강하게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서 오는 편안함일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기존 불상들은 근엄하고 남성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벽을 황토로 마감한 듯하다.
이 전시실의 기획자는 단순히 이 공간을 '유물이 존재하는 곳'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었나 보다. 그 신념과 열정이 느껴져서 더욱 감동했다. 기획자가 누굴까.
단체 해설이다 뭐다 해서 시끄럽지 않아서 좋았다.
유물을 그저 유리관 안에 넣어놓지 않아서 좋았다.
뒷모습도 볼 수 있도록 360도로 구성한 게 좋았다.
이런 게 바로 기획이지.
기존 전형적인 박물관의 전시방식에서 벗어나, 마치 '쇼'를 하는 듯한 구성과 배치로 색다른 공간을 창조해 냈다. 게다가 제목이 '사유의 방'이라니. 구석구석 보면 볼수록 기획자가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
눈에 담아두려고 한참을 가만히 봤다.
혹시 나도 깨달을 수 있을까 봐.
오늘 나에겐 여기가 바로 사찰이다.
아 맞다.
아들하고 PC방 가야 된다는 걸 깨닫고 나왔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해가 진다.
이제 집에 가자.
날이 좀 풀렸나.
집까지 걸어서 가보자.
걷는 길에 한강이 예뻤다.
생각하고 싶을 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서 볼 수 있는 유물이 있다는 게 편안하다.
이게 나만의 루틴이다.
힘내게 만드는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우리는 늘 바쁘다.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도 삶에서도. 멈추면 도태될 것 같고, 그래서 두렵다. 반가사유상의 고요한 사색의 자세는 그런 우리에게 말한다. 잠깐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봐도 된다고. 깊은 사유의 표정 속에는 단순히 불교적 깨달음을 넘어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내면의 성찰이 담겨있다.
속도를 좀 늦춰도 되니 마음의 중심을 찾아보자.
나는 왜 사는지, 삶의 본질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져보자.
오늘도 잘 봤습니다.
반야바라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