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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업(惡業)을 쌓는 리더에게

고통은 결국 되갚아지리니

by 이서


지난번, 12사단 훈련병 사망 사건에 대한 글을 발행했다.

https://brunch.co.kr/@dontgiveup/382


당시, 그 글을 통해 리더에게 반드시 측은지심과 긍휼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조직의 리더가 권력자의 지시 혹은 자신의 권력욕 그 자체에 단순 무지성으로 반응하여 조직원들을 압박하고, 통제하면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지 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건의 배경과 구체적인 정황이 궁금하신 분들은 위의 글을 읽어보시길.)


가해자 강** (출처, 중앙일보)


그 사건의 최종 판결이 얼마 전 대법원에서 있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660/0000093602?sid=001


훈련소에 입소한 지 13일 차 밖에 안된 21살의 젊고 창창한 젊은이를 죽였는데, 겨우 5년 6개월이 나왔다. 군기훈련을 가장한 가혹행위로 사람을 죽였는데, 겨우 5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안다. 지휘관의 명령이 부대 내에서 어떤 권위를 갖는지. 가해자는 군 간부가 된 것을 마치 벼슬인 것 마냥 생각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이건 단순한 지휘 실수가 아니다. 살인이다.


나는 5년 6개월이라는 숫자가 믿어지지 않았다. 숫자를 잘못 읽은 게 아닌지 기사를 한참 읽고 또 읽었다. 56년이 아니라 5년 6개월이었다. 고작 5년 정도 지나면 저 가해자는 다시 사회로 나와 낄낄대며 자유롭게 인생을 즐길 것이다.




연병장 흙바닥에 누워 거품을 물고 흰자가 뒤집어진 채 "죄송합니다!"를 외치던 자기 부하에게 엄살 부리지 말라며 가혹행위를 끝까지 지시한 지휘관. 당시 훈련병의 체온은 41도를 넘은 상태였다. 결국 훈련병은 급성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 그걸 그대로 지켜본 지휘관.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악행의 끝은 어디인가.


누군가는 이번 판결을 군내 가혹행위 사건 관련 판례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형량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단순 주의 의무를 위반한 업무상 과실 치사로 본 것이다. 이 사건에 '업무상 과실 치사'라는 혐의를 주는 건 너무 순진하고 편리한 결론이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나치 휘하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독일인들도 그저 위력에 따른 단순 지시 이행 정도로 보는 게 맞는 걸까.


막강한 권력을 가진 부대 내 지휘관들에 대한 법적 판단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당연히 달라야 한다. 권한이 기형적으로 집중되어, 신처럼 군림하는 권력자들의 윤리적 방만은 반드시 강하게 엄벌에 처해야 한다. 그것이 군이든 회사 같은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행동의 해석에 경중따윈 없다.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신체에 고통을 주는 징벌 방식의 얼차려가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함에도 여전히 그 악습은 계속되고 있다. 신체적 고통으로 순종을 강요하는 구시대적 발상은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대 내에 잔존하고 있다.


그나마 가혹 행위의 고의성이 일부 인정되어 받은 형량이 겨우 5년 6개월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건은 '사격'이나 '행군'등 일상적인 훈련 과정에서 벌어진 사고가 아니다. 권력을 가진 한 개인이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강제한 '얼차려'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정상적인 훈련 과정에서 나온 과실 사망으로 볼 수 없다.


단순한 실수를 넘어선 직무상 의무 위반이나 고의에 가까운 감정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이는 해당 사망 사건을 더 엄중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법적, 도덕적 책임의 무게가 훨씬 무거워진다. 단순한 사고가 아닌 '가해'로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요구되는 사안이다.




업보는 쌓인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業報)'는 단순한 숙명이나 운명론이 아니다. 의도적인 행위(業, Karma)의 결과가 반드시 행위자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다.


여기서 업(業)은 몸(身), 말(口), 생각(意)으로 짓는 모든 의지적 행위를 뜻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배려와 긍휼은 이타적인 선업(善業)이다. 조직 내에서 부당하게 약자를 억압하는 행위는 악업(惡業)으로 쌓인다.


권력자가 행하는 말, 행동 등 모든 리더십은 이처럼 업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약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한 행위는 결국 행위자에게 평안과 복덕의 결과를 낳고, 악한 행위는 행위자 개인의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보(報)를 낳게 된다. 따라서 업보의 관점에서 모든 권력은 책임을 동반한다. 그 책임 있는 행동만이 행복과 평화, 그리고 최종적으로 번영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길이다.


반드시 업보는 쌓인다.




당연히 회사도 마찬가지다.


조직의 크기와 종류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그들이 행사하는 힘의 무게만큼 약자와 부하직원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을 기본 소양으로 갖춰야 한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의무를 넘어선, 조직과 인간사회 전체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리더십이다.


그 마음가짐이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비롯되든, 혹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긍휼(矜恤)의 마음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들을 대하는 태도다.


당신의 부하 직원들 모두 한 가정의 자녀이며, 가족이고, 아빠이며 엄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하찮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당신의 그 알량한 성과 기준으로 개인의 가치를 판단하기엔 한 사람 한 사람 그 소중함이 크고 귀하다.


약자를 억압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 부정적인 업보가 되어 권력자 자신과 그 주변 전체에 돌아온다. 배려와 존중이 결여된 권력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이는 결국 조직의 실패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부메랑과 같다. 그것이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돌아온다.


그러니 올바르게 살자.

적어도 악한 삶을 살지는 말자.


부디 당신이, 이번 생에서 많은 선업(善業)을 쌓기를 기원한다.

반야바라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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