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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Nov 11. 2021

제대로 된 사다리를 주세요

제조 대기업 IT부서가 갖지 못한 그것


회사마다 문화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하는 방식, 서로를 대하는 태도,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 등 다양한 방면에서 문화는 큰 힘을 발휘한다. 요새는 '문화' 그 자체가 하나의 복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다. 돈만큼이나.

넷플릭스의 문화를 소개한 '규칙 없음' 같은 책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회사 내부의 문화가 일하는 직원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고, 당연히 성과로 이어지니 경영층에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대표 혹은 C레벨들은 수시로 문화를 점검하고 다듬고 방향을 잡아나간다. 그게 회사를 100년 200년 이어나갈 힘이 된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제대로 된 IT 회사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제조업 등 대기업의 IT 부서에서는 꿈도 못꿀 일이다. 문화가 뭔지 관심도 없는 실장,팀장,임원들이 수두룩하다. 차라리 '나는 그런걸 잘 모른다' 고 솔직히 고백하면 다행이다. 어설프게 IT기업에서 넘어온 임원들이 우리는 혁신과 개선(소위 말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해야 한다며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는 본인 자리 보전을 위해 열심히 뻥카를 날리고 다닌다.(거대 금융회사들이 야심차게 내놓은 ㅇㅇ페이 시리즈 중에 제대로 성공한게 있는가?) 실제로 임원들은 1년 계약 연장만 되면 수억을 땡겨갈 수 있으니, 어떻게든 자리 보전만을 노리고 행동한다. 내가 만든 신규 서비스가 메인이 되어야 하고, 마스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절대 다른 팀에 빼앗기면 안된다. 회사의 성장 그런건 관심 없다. 내 자리가 우선이다. 

임원도 인간이고, 인간은 어차피 동물이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행동하는거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창피한 줄은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창피한 줄도 모른다.)

문제는 고위 경영층(오너 일가)이 그걸 눈치채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안목도 의지도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팀에 인력이 없어 리소스 부족에 허덕이고, 

레거시는 엉망진창으로 손대기 힘든 상황인데다가, 

주위 서비스들에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이 쏟아져들어오는 힘든 조직이 있다. 

다들 힘든 와중에 갑자기 임원은 글로벌 전략을 이야기한다. 해야 할 일들이 분명 눈 앞에 쌓여있는데, 글로벌로 나아가잔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만은 그런 임원들이 대기업 IT 부서에 가면 발에 채이게 많다.

당장 화면 문구 수정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데, 우리는 해외에 플랫폼을 확장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임원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걸까?


"팀장님, 조직원들도 너무 힘들어하고, 리소스도 많이 부족합니다. 글로벌 확장 보다는, 국내 시스템 정비 등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소리야~ 그렇게 레거시가 엉망이면 싹 새로 갈아엎고 다시 구축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기획서 작성해보세요!"


싹 갈아엎는건 스위치 처럼 껐다 켤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거대한 레거시가 꾸역꾸역 굴러가며 운영되고 있는데, 새로 만든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기업 IT부서에서 혁신적인 프로덕트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


"애자일하게, 린하게, MVP위주로 한걸음씩 베이비스텝으로 걸어나가는 문화"

(애자일이란 말도 이제는 촌스러운 시대이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는 저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고 본다.)

그런 문화를 위에서부터 이해하고 분위기를 조성해주어야 하는데,

큰 거, 멋진 거, 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한 방. 그런 것만 주야장천 떠들어댄다.

멋지게 일하는 문화는, 대기업 IT 부서에서만큼은 먼 나라 이야기다.


 당신은 어느쪽에 서 있나요


IT 서비스의 특성상,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올라갈 수 있다.

위 그림의 '좁은 간격 사다리'는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버튼 하나를 고치든, 플로우 하나를 개선하든, 문구 하나를 손보든, 베이비스텝으로 한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우리도 글로벌 플랫폼, 응? 그런거 만들어내봐요!' 식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계속 떠들면, 결국 사다리 한 칸도 못올라가게 된다. 

저 그림의 '넓은 간격 사다리'처럼 말이다. 

넓은 간격 사다리의 저 사람은 (임원이 원하는) 이해도 안가는 장표를 그리고, 보고서를 만들고, 시간은 쏟겠지만, 아마 단 한 칸도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좁은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베이비 스텝으로 한걸음씩 천천히 사다리를 밟아 올라나가야 한다.

"어? 이게 되네? 조금씩이지만 우리 올라가는거 맞지?"

조직원들은 성취감을 느끼고 해냈다는 자신감을 가진다.

무엇보다, 결과물이 나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에서 '저게 되는구나. 나도 사다리를 만들어봐야지, 나도 올라가야지' 라는 동기부여 또한 자연스럽게 줄 수 있다.


간격 넓은 사다리의 조직원들은 

"아, 사다리가 있구나.. 저길 올라갈 수 있을라나..." 라는 막연함만 가진다

당연하게도 한 칸을 못올라간다.

(물론 키가 엄~~~청 나게 큰, 그러니까 역량이 슈퍼스타급이 되는 실무자가 나타난다면 한 계단 정도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여기는 팀플레이를 하는 IT조직이잖는가)

주변에서도, 어차피 못 올라갈꺼야 하면서 포기하고, 다른 사다리를 만드는 것 조차 자연스럽게 포기해버린다. 조직은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한채, 패배 의식만 깊어간다.

내가 이 브런치에 예전에 썼던, '정체모를 추상화같은 상위기획서만 난무하는 뜬구름 파티 조직'에서는 그 어떤 결과도 나올 수 없다. 

'넓은 간격 사다리' 아래에는,

패배 의식에 가득찬 사람들만이 '글로벌' , '가상현실' , '빅데이터' , '인공지능' , '메타버스' 같은 그럴듯한 단어들만 잔뜩 들어간 상위기획서를 손에 들고 서성댈 뿐이다.


좁은 간격 사다리를 가져다 놓아주는 리더,

우리 같이 조금씩 올라가 볼까요? 라고 먼저 앞장서는 리더,

그런 리더(임원)는 그 자체로 조직의 문화가 된다.

IT 서비스를 담당하는 부서에는 그런 문화가 필요하다.

(말로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외쳐대는 제조 대기업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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