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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 Sep 11. 2021

산출물 그까이꺼


"ㅇㅇ 프로젝트는 현재 ㅇㅇ팀 ㅇㅇㅇ과장과 협의 중입니다. 그리고 엊그제 회의를 진행했는데, 저희쪽 개발 진척률 관련으로 불만이 많더라구요. 속도를 내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사업팀 요청사항 몇가지가 있는데, ㅇㅇㅇ 기능 추가 랑 ㅇㅇㅇ 안내 발송 건입니다."


"공유 감사합니다. 혹시, 정리된 문서가 있나요?"


"....."


일을 진행하면서, 문서 형식으로 기록된 산출물이 반드시 나와야 하는가?

일하는 스타일,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답변은 다를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뭐, 산출물이 필요합니까, 구두로 전달하면 되지. 불필요합니다." 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진행하면 과정과 결과에 따른 기록이 나와야 합니다." 라고 할 수도 있다.


가끔 일을 진행하다보면, 다른 사람이 진행하던 업무의 히스토리와 맥락을 파악해야 할 때가 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고, 어떤 의견들이 있었으며, 언제 무엇을 했는지 등등이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보통 대부분은 말로 설명하려고 한다.

'아 그거요, 그게 이러쿵 저러쿵 해서 그렇게 저렇게 진행 됐습니다."

듣다보면, 앞뒤도 안맞고 중언부언 횡설수설 일 경우가 많다. 수치도 오류가 많고, 논리도 맞지 않다. 날짜같은건 당연히 기억 못한다. '아마, 작년인가 재작년일껄요?' , '엄청 오래 걸렸어요' , '리소스가 어마어마하게 투입되었죠 아마'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나게 떠든다.

듣고 있자면, 도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기억은 휘발되고 왜곡된다. 당장 며칠전 먹은 점심메뉴도 기억못하는 인간의 두뇌로, 도대체 어떻게 전부 기억하겠다는 것인지.


보통 그런 사람들이 많은 회사일 수록 '사람이 히스토리'인 경우가 많다. 진행 내용을 자기 머리에 넣어놓고 공유하지 않는다. (제대로 넣어 놓지도 못한다. 잊어버리고, 착각하고, 결국 고집피운다) "아 그거는 ㅇㅇ팀 ㅇㅇㅇ차장에게 물어보세요." 수준의 대화만 오고간다. 왜 그렇게 기록하고 문서화 하는 걸 싫어할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애초에 문서로 정리할 능력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귀찮은거다. 글로 정리하려니 떠오르지도 않고 잘 써지지도 않는다. (써 본적이 없으니 성장할 수도 없다) 일도 많아 죽겠는데, 무슨 기록이냐 라고 생각한다. 누가 물어보면 그냥 대충 설명해서 넘어가면 되는데 뭐 어때. 기록하면, 대충 뭉개고 어물쩍 넘어갈수 없잖아. 귀찮은데 그냥 모른척 무시하지 뭐. 회의록? 나 몰라? '내 기억이 회의록이다. 짜식들아.'


두번째, '알고 있다' 사실만으로 권력을 가진  든든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후배나 동료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의 알량한 지식  자체가 파워이기 때문에, 나눠주면 힘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대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구두로만 전달한다. (그래도  수준이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정도는 있다고   있다)


세번째, 하는 일이 없다는 걸 들킬까봐 겁나기 때문이다. 진행 중인 일들을 문서화 해서 기록해야 한다면, 내가 놀고 있다는 걸 모두 알게 된다. (산출물, 기록이 없으니까 주변에서 추측이 가능하겠지) 그래서, '기록하지 않는 사람' 이라는 이미지를 동료들에게 각인시키고, 열심히 입만 털며 일하는 '척'할 수 있다. 보통 이 부류는 중간 리더 들에게 많이 발견된다. '업무 분배'('던지기'라고 부른다) 이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중간 리더들은 '주간업무 보고 작성'만이 지상 최대의 업무이기 때문에, 따로 기록할만한 프로젝트성 진행이 없다. 자기는 매니징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바쁜거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어싸인된 프로젝트가 없다고 넋놓고 있으면 곤란하다. 담당하고 있는 프로덕의 문제점이나 이상향을 큰 그림으로 파악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방향을 제시할 만한 기획을 할 수 있잖는가. 굳이 상세기획일 필요는 없다. 리더니까 전체 그림을 보고 있을테고, 그렇다면 3개년/5개년 계획 등의 '큰' 설계가 가능하다. 리더라면 그런 산출물을 주기적으로라도 내야하는데, 그러지 않는 중간 리더들이 대부분이다. '회의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 라는 핑계들을 많이 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리더다. (그래서 리더는 아무나 시키면 안된다.)

이런 리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이렇게 '문서화하고 기록할 줄 모르는' 리더는 업무 지시를 내릴 때도 대충 구두로만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내 지난 글에서 '앤더슨'이 딱 이런 스타일이다. 자기가 뭘 지시했는지 기억에만 의존하니 이랬다가 저랬다가 말이 막 바뀐다. 이런 사람은 답이 없다. 부하직원 혹은 주니어들이 '녹취를 하든지' 알아서 잘 대처하는 수 밖에.


내가 당장 내일 퇴사하더라도, 후임이 내 기록을 훑어보고 업무를 곧바로 이어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게 두려우면, 계속 위태로운 자리에서 덜덜 떨며 일하는 수 밖에 없다. 자신감도 없고, 성취감도 없다.

거창한 형식의 문서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회사가 위키를 쓰면 위키에 남기면 되고, 사내 시스템이 있다면 거기 남기면 된다. 그런 것도 없다면 이메일이라도 구체적으로 잘 써서 남기고 공유하자.


우리 조상님들은 약 500년에 걸친 조선시대의 대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 국왕의 업무와 행사 등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승정원 일기' 등 기록에 대해서만큼은 그 능력이 매우 뛰어난 분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한 것도, '국가기록관리 혁신' 로드맵을 세우고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 체계를 바로잡은 일이었다.

기록과 문서화는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후손들에게, (이 글은 직장 이야기니까) 후배/후임 들에게 남기고 전달해야 할 숙제다. 더군다나 하루가 다르게 변경과 배포가 일어나는 IT업계에서, 그 의사결정 과정과 히스토리 기록은  도메인 관리에 필수적인 숙명이다. PM만 문서를 남기란 법은 없다. 개발자들 중에도 글을 쓰고 문서화하는 멋진 사람들이 많다. 누구든 '문서화'를 잘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했으면, 짧게라도 기록을 남기고 문서화 하자. 그렇게 공유하자. 지식을 나누고 베풀면 그 과정에서 본인은 빠르게 성장한다. 좋아지는 평판은 덤이다.

산출물, 그까이꺼. 어렵지 않다. 기록해보자.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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