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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Sep 02. 2022

초록을 한 움큼 먹으니 온몸이 싱그러워

이름부터 내 스타일인 초록집에 다녀왔다

내게 충분한 시간을 줘서 그럴까.  오랜만에 온몸에 생기가 돌며 남은 2022년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운이 나기 시작한  2주도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해버렸다. 뜻하지 않게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다시 텐션이 맥을 추리지 못하고 기어 다녔다. 아무리 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하필   타이밍에!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텐션이 쉽사리 오르지 않았다. 떨어지기는 이렇게 쉬운데, 끌어올리는 건 왜 또 이렇게 어렵담. 긴장이 풀리고, 왜인지 어색하고 막막했다. 한 번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곳에 다시 처음부터 적응해야 하는 기분. 집도, 회사도, 일도 모든 것이 낯설어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찰나 성수동의 house of green(일명 초록집)이라는 공용 작업실에서 이틀간 머물며 일할 기회가 생겼다. 회색 철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은은한 향이 좋아서일까, 작업실을 뒤덮은 초록과 큰 창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 덕분일까, 대표님이 소개해주시는 공간과 물건마다 애정이 느껴져서 그런가. 나를 위해 세심하게 이름표까지 붙여주셔서 그런가. 마치 내가 원래부터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언제 기력이 떨어졌다고 했나.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할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와 나 여기 장기로 입주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집이나 회사에서 멀면 절대 안 가니까 성수동으로 이사 나올까?! 원래 성수동 계속 살고 싶어 했잖아!!! '라는 의식의 흐름으로 호갱노노를 들어가게 되는데... 성수동에 집을 못 샀던 이유는 돈이 부족해서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작업실 겸 아지트를 늘 선망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던 이유도 다시 한번 곱씹으며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미루어둔 일을 밀린 설거지 하듯 뽀득뽀득 해냈다. 오랜만에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일주일 만에 집중력을 잃은 나를 자괴하며 퇴근한 게 불과 하루 전인데, 어찌나 일이 잘 되던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었다. 역시 섬세한 공간과 다정한 사람들 사이에 나를 두어야 한다.


문득 체력이 달린다는 이유로 나를 지탱해주는 공간과 사람 찾기에 소홀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여름과 가을 하늘 사이 하늘이 유달리 맑은 날, 초록집에서 보낸 이틀이 참으로 큰 환기가 된다. 손수 내려주신 커피와 중국식 만두, 야외 테라스에서 휴지가 날아가지 않게 잡아두며 먹는 새우 샐러드. 그리고 그 짧지만 긴 식사 시간에 나눈 일, 투자, 삶, 가족, 여행에 관한 재미난 대화. 나는 사람이 싫어진 게 아니라, 아무나와 의미 없게 보내는 시간이 불편한 거였나 보다.


밤늦게까지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이 시간을 만끽해보고 싶은데, 이제 그만 퇴실할 시간이다. 나가기 싫어서 이 글이 마무리가 안 되는 걸까. 아무튼, 초록집에서 보낸 이틀 덕분에 코끝이 시원하다. 앞으로 두세 달은 날이 좋을 테니, 가볍게 책 한 권과 노트북을 들고 나와 결이 맞는 공간과 사람을 찾아 나서야겠다. 특히, 이른 퇴근이 가능한 금요일을 잘 활용해서 워케이션까지는 아니지만 노트북과 도란도란 작업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많이 찾아다녀야지. 그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자신이 없어 찾지 못했던 오랜 친구들과 새로운 친구들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언젠가 생기가 필요한 날에 또 올게요. 생각해보면 이름부터 내 스타일이었던 초록집. 안녕, 고마워요. 이틀 간 나를 이곳에 놓아둘 수 있어서 참으로 새롭고, 유쾌하고, 포근했어요. 자매품으로 용기도 한 움큼 얻어갑니다.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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