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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Sep 06. 2022

나쁘지 않아

뭐 엄청나게 좋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대학 시절 동아리 선배를 만났다. 내 첫 사이드 프로젝트 시작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재능을 나누어주었던 사람.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또다시 여전히 시니컬하면서도 나름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적당히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학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그 동아리와 사람들이다. 입시 실패(?)와 무망감으로 고생하던 내게 처음으로 소속감과 열정을 끄집어 내 준 내집단. 지금 와서야 ‘그때 우리가 시간을 낭비했다. 그 시간에 사업을 해봤어야 한다. 투자를 했어야 한다. 돈을 벌었어야 한다.’ 이런저런 의미 없는 후회(?)를 가장한 추억 팔이를 하지만. 그때 배운 것들이, 함께 도전했던 것들이 지금 내 밥벌이와 취미 생활이 되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고민하며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옛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가끔은 '하 씨. 나는 한심하게 왜 이러고 있노.'라는 생각도 하지만, 역시나 결국에는 포기하지 않을 마음의 힘을 얻게 된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맥주 유학을 다녀와 코로나도 이겨낸 자영업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그렇게 원하던 글을 쓰는 웹소설 작가가 되었다. 또 다른 선배는 회사에서 독립해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사람들도 내가 알기론 꽤 힘들었거나 여전히 힘들다. 그래도 각자의 성향에 맞게 사업을 하기도, 회사를 다니기도, 공부를 계속하기도 하면서 흔들리더라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는 자체만으로도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끊어졌던 소식이 다시 들리는 것만큼 벅찬 순간이 또 있을까.


2022년 나의 목표는 느리게 살기였다. 너무 감당하지도 못할 욕심만 이만큼 부리며 우당탕탕 달려온 사회 초년생 시기를 잘 매듭짓고, 내 방향과 속도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다짐 또 다짐했다. 부상을 온전히 회복하기 전에 절대 달릴 생각일랑 하지 말자고. 불쑥불쑥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진정시키며 한 해를 보냈다.


사람들과 교류를 줄이고, 그저 조용히 이직을 준비하고, 그 사이에 푹 쉬고, 새 회사에서 잘은 아니지만 슬금슬금 적응해보고, 요가도 글도 멋지지는 않지만 천천히 꾸준하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삶이 꽤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깜짝 놀랐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는 날이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인 지.


조만간 , 대단히 멋지지는 않아도 나쁘지 않은 일들을 벌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보지 못하고 살았던 이들도 다시 만나고. 적당히 사는 것도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시간이 해결해준 건가?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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