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 Sep 22. 2022

퇴사하고 싶은 마음도 시간이 해결해주나요

아주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른 살에 백수가 된 키라.

부자가 되고 싶었는데
백수가 되어버렸습니다.


불과 반년 전에 끝까지 쓰지 못하고 작가의 서랍에 사표처럼 품어둔 글의 제목과 첫 문장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좋은 것만 기억에 남는다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십억을 계좌로 쏴준대도 절대로 올해 2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오죽했으면 돈 밖에 모르던 제가 백수를 택했겠어요. 단 하나 후회가 있다면 ‘왜 더 빨리 나가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하는 마음뿐입니다.


그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요. 친하게 지내던 믿고 의지하던 선배가 떠나고 그 빈자리를 메우면서 어찌어찌 2020년 11월을 마무리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회사를 나올 때까지 육 개월은 그저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 가장 힘들었던 건 직속 상사의 조직 운영 방식과 내가 맡은 일이 너무 모호하다는 점, 이 회사에 나 하나 없어도 티도 나지 않을 것 같다는 나 자신의 '무용함'을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이 조직 안에서는 영원히 무능할 것 같다는 마음. 다른 팀으로 옮기는 걸 상상해봐도 잘할 수 있는 것도, 잘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회사와 일이 싫어지는 건 당연했죠. 그런데 그 마음이 일 밖의 삶으로까지 자꾸만 넘어와 살아가는 일 자체에 자신감을 잃고 무력해져만 갔습니다.


첫 직장에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때문에 더 소중한 것들도 잃어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일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밥벌이만큼이나 내겐 나만의 자존감과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거든요.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뒤에 어찌어찌 일이 풀려 그만두는 날에 다른 곳으로 이직이 결정되었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도 그만두었을 겁니다. 가난도 무섭지만 그나마 '백수 상태'를 견디는 게 쉬워(는 센 척이고 감당할만해) 보였어요.


그 시간을 견뎌냈으면 저는 그곳에서 지금처럼 적당히 잘 지냈을까요. 다시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찾았을까요. 그러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회사가 완벽한 건 아니지만, 다행히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고 타협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생겼고 새로운 환경에서 그나마 손에 익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침이 있지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첫 직장에서 내가 이래서 직무를 옮겨 이직했었지.'라는 생각도 자주 듭니다. 지금 하는 일의 한계가 명확하게 보이고, 고민해서 가야 할 길이 구만리처럼 느껴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회사를 탈주해야겠다는 생각은 좀 누그러들었어요. 아니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육 개월 동안 뭐 그렇게 대단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금융 치료를 받은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나는 살만해진 건지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당장 다음 주에 어떤 챌린지를 받을지 알 길은 없지만 확실한 건 내일 회사 가기 싫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냥 이 사실만으로도 놀랍습니다.


아직 명쾌한 답은 모르겠지만,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겠습니다. 두 계절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결한 걸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남은 2022년도 저전력 모드로 운행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