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 여행기 (2) - 베네사 뮤지엄과 노란 호박
(이전글) 나오시마 여행기 (1) - 지중미술관과 이우환미술관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운명이에게 "아, 베네사 하우스 오브 뮤지엄은 안 가도 될 것 같아."라고 말했던 나였다. 하지만, 지중미술관과 이우환미술관에서 만난 안도 타다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니 욕심이 났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면 어쩌면 베네사 뮤지엄도, 다음날 예정된 테시마 뮤지엄도 다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정한 운명이는 나의 급발진에 흔쾌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눈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만) 그러자고 했다. 문제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베네사 뮤지엄까지는 걸어가야 한다는 점. 어쩐지 나오시마에서는 구글맵이 2% 부족하게 작동했는데, 그래도 해안가를 따라 난 외길 코스라 길을 잃을 일은 없으니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해안 절벽이라니, 수년 전 산토리니에서 항구를 찾아가던 길이 떠올라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하지만, 롱부츠 투혼으로 2만 보를 돌파한 발바닥은 더 이상은 걸을 수 없다고 난리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베네사 뮤지엄으로 입장. 입구에서 안도 타다오의 시그니처 노출 콘크리트를 보면서 ‘와 이 업체 돈 많이 벌었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거래하던 곳이랑만 하겠지? 하면서.
아마 이성이 돌아온 이 순간, 미술관 입구에서 멈췄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로서 다음에 돌아올 구실을 하나쯤은 남겨둔다는 여행의 또 다른 룰도 깨버리고 말았다.
방문할 예정이 없었기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도 모르고 들어섰다. 광화문 씨네 큐브 앞을 지키고 있는 해머링 맨의 작가 조나단 브롭스키의 작품 <chatter, chatter, chatter>가 시끄럽게 반겨주었고, 낯익은 호크니의 작품도 보였다.
자연을 중시하는 안도 타다오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건 저 멀리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고 결국에는 해변까지 밀려온 노란색, 검은색 배가 놓인 제니퍼 바틀렛의 작품. 뒤를 돌아 창을 보면 저 멀리 진짜 해변에 노란색, 검은색 배가 있다.
내가 보는 게 작품인지 현실인지 둘 다인지 헷갈리는 순간에 바깥으로 나가니 여러 장의 바다 사진이 걸려 있다. 미술관 밖에서 바람과 비와 햇살을 온전히 맞으며 진짜 바다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도 잠시 나를 내려두었다.
마지막으로 브루스 나우먼의 <100개의 삶과 죽음> 앞에서 나는 죽음에, 운명이는 삶에 먼저 시선이 닿는 것을 보고 '우리는 참 다르네.' 하면서도 하루에 미술관은 최대 2.5개가 적당한 것 같다는 데에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미술관을 나와 다시 호박무늬 마을버스를 타러 버스의 종점인 츠츠지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해변가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길이었다. 네 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해도 슬그머니 지기 시작하고 날씨도 꽤나 선선해졌는데, 정말 발가락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멋 내다가 똥둣간에 빠진다던 외할머니의 잔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왜 힘들지 않겠느냐만은 긍정왕, 체력왕, 텐션왕 운명이는 아이돌인지 아이들인지 요즘 노래를 들으며 찰랑거리며 앞서 가고 있었다. 나는 동양화의 정수인 수양의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 성질, 내 예민성 죽이며 따라갈 뿐이었다.
츠츠지소로 가는 길에는 나오시마의 상징이기도 한 노란 호박이 있다. 사실 과천에서도, 뉴욕에서도, 세계 어디에서도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은 너무 자주 접해서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무엇인가를 특별하게 여길 탄수화물도 체력도 잔고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고 구차하게 변명을 해본다.)
하지만, 운명이는 "내가 너 첫회사에서 만났을 때 네가 노란 호박 문서 파일 들고 있는 거 보고, 어머! 미술 좋아하세요? 저랑 일본 나오시마섬 가실래요?"라고 한 말이 지금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 아니냐고 말하며 호박으로 달려가 꽉 안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한 발짝 멀찍이 떨어져 노랑에 물들어가는 운명이를 향해 몇 번이고 셔터를 눌러댔다.
다시 호박 섬의 호박무늬 버스 정류소에 도착했다. 아직 네 시밖에 안 되었으니 숙소에 짐 풀고 잠시 쉬면 또 나와서 구경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