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 Jan 01. 2023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주 사소한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다 보면  

다들 바빠 죽겠다는 와중에, 나만 그렇지 않은 날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너무 늘어지게 흘러 무료하고 지겨운 순간이 어찌나 많았는지. 자주 낮잠을 자고,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가끔 책을 보다 또 잠들고, 그래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부스스 일어나 느지막이 출근을 하는. 남이 차려주는 밥과 남이 내려주는 커피, 남들이 쓴 글 위에 의견 몇 자 보태기만 하면 되었던, 듣기만 해도 허리 아프고 지루한 날들.


머리도 대신 감겨주고, 고장 난 만년필의 A/S도 대신 받아준다. 병원 예약은 물론이고, 읽고 싶은 책도 켜켜이 쌓아준다. 일에 몰입하라고 제공하는 복지인데, 자꾸만 감각이 무뎌지니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말하면 비겁한 변명일까. 모든 것이 위탁되는 삶. 시간이 너무 편하고 느리게 가서 오히려 나의 무용함을 더 절절히 느낀 날들. 정말 영화처럼 올해 일어난 모든 것이 그랬다. 일도, 여행도, 일상도, 사랑도.




성장과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거리를 두었다. 사는 게 여전히 즐거운 친구들에게도 그저 웃어 보이고 말았다. 무던하게 하루를 지키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질투를 느꼈다. 영화 <패터슨>은 삶을 반쯤 내려놓아버린 이들에게, 다시 빈 페이지를 건넨다.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주 사소한 순간을 적어 내려가보라고.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 씨는 매일 새벽 여섯 시 반, 조용히 일어나 시리얼을 챙겨 먹고 출근을 한다. 버스 운행 전 잠깐 짬을 내서 시를 쓰고, 말 많은 동료의 특별히 궁금하지 않은 안부를 묻는다. 매일 같은 노선을 운행하지만, 달라지는 승객들의 대화를 들으며 오전 일과가 끝난다.


도시락을 챙겨 먹으며 시를 마저 쓰고, 퇴근 후엔 아내의 꽤 희망차지만 유난한 하루 일과를 듣는다. 환 공포증을 일으킬 것 같기도 한 실내 인테리어, 카우보이를 연상시키는 새 얼룩무늬 기타, 방울양배추와 체다 치즈를 넣은 실험적인 저녁 메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땐 물과 함께 꿀꺽 삼키기도 한다.


자기 전엔 강아지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바에 앉아 맥주 한 잔 하며 주인장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결국 별일 없이 아내가 좋아하는 맥주향을 머금고 침대로 돌아온다.




월요일부터 그다음 월요일까지. 영화는 한 편의 시처럼 내내 반복과 운율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나는 행과 행 사이에, 연과 연 사이에 내내 졸았다. 그리고 마침내 불길한 예감이 비껴가지 않고 그의 비밀 노트는 필연적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자신보다 더 어쩔 줄 모르는 아내를 두고 나와 멍하니 공원에 앉았을 때, 나도 이것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닥친 현실임을 자각했다. 누군가의 이야기였을 때는 그렇게 졸리더니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자 잠이 번쩍 달아났다.


멍하니 공원에 앉아있다 여행자로부터 새로운 노트를 받아 들었을 때, 관객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그는 잠시 멈췄던 시를 계속 써 내려갈 것이란 걸. 그리고 나도 알았다. 나도 결국 또 쓸 수밖에 없을 것이란 걸. 의미도 재미도 기대도 변화도 크지 않은 날들을 오래도록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계속 무엇이라도 찾아낼 거고 그 순간을 기록하게 될 것이란 걸.


얼마나 사소한 기록이 될지 좌절스러우면서도 허무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붙들 수 있는 게 하나는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게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