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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Nov 18. 2018

현실과 타협하는 중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계절(5)

Venice beach

미국 시간 9월 15일 토요일 오전 10시


상상력은 결국 어디선가
보고 듣고 읽은 것에서 오겠지.


요즘 로스앤젤레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베니스 비치가 가장 힙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잡지가 쓰인 지 못해도 몇 달은 지났을 테니 더 이상 '요즘'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구글링을 해보니 힙하긴 힙했다. 반스를 신은 젊은이들은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온갖 묘기를 부리고, 수영복을 입은 이름 모를 그와 그녀들은 어찌나 탄탄한 지. 과연 나와 같은 종족일까 싶더라.


함께 보드를 타고, 웃통을 깔 수는 없어도 좋은 모델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눈을 뜨자마자 베니스 비치에 갔다. 그런데 웬걸. 도착하자마자 해변가의 노숙자들과 경찰들이 "여기 있는 거 불법이다. 나가라." "난 갈 데 없다. 못 나간다. 내쫓을 거면 어디 한 번 때려봐라." 실랑이를 하고 있다.


아침 댓바람부터 욕지거리를 듣고 벙찐 내게 친구가 깔깔거리며 말한다. "여긴 1년 내내 날씨가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집 없이도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젠 불금이었잖아. 토요일 아침 베니스는 완전 난장판이지.


말이 좋아 요즘 '뜨는' 동네지, 아직 개발이 덜 된 동네 아니겠어?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남쪽으로 걷다 보면 베니스 비치가 이어지는데 그 둘의 경계를 어떻게 나누는지 알아? 쓰레기통이랑 화장실이야. 화장실이 깨끗하고, 쓰레기통이 줄지어 선 곳까지가 산타모니카, 아무리 급해도 여긴 쓰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베니스."


아 그렇지... 내가 또 너무 순진했구나. 나의 상상력에 돈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구나. 너무 좋은 것만 보고, 보여주는 것만 믿는구나. 뉴욕에 척과 블레어가 없는 것처럼 이 곳에도 숙취에 시달리는 평범한 젊은이들 뿐일 텐데. 반성했다.


The Green Doctors라고 크게 써붙이고 대마를 파는 초록색 가게들과 한국인이 운영하는 멕시칸 음식점, 야한 티셔츠를 파는 기념품 샵이 태평양을 따라 길게 뻗어다. 차마 렌즈 캡을 벗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드디어 핀터레스트에서 그렇게 보던 스케이트 파크에 도착했다. '그래도 전 세계 스케이트 보더들의 성지라던데 여기선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라고 토요일 아침에 절대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국의 직장인은 상상했다.


왜 미국인들은 나와 달리 부지런할 거라고 생각한거지? 방금 반성해놓고, 또 허무맹랑한 꿈을 꾸다니. 아침 일찍부터 보울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이보다 구경꾼들이 더 많았다.

결국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멋진 묘기는 볼 수 없었다. 카메라는 보지 못한 것을 남길 수 없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지만 나의 상상은 현실과 타협했다. 그런데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자꾸만 어디서 들은 대로 상상하게 된다. 포토샵으로 비니라도 노랗게 칠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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