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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이래서 좋아합니다

야구팬으로 살아남기 #2 : 3아웃, 9이닝, 144경기의 희로애락

by 지원

올해 들어 주변에 막 야구를 챙겨보기 시작한 지인들이 부쩍 늘었다. JTBC '최강야구'를 통해서든, 친구나 연인을 통해서든, 야구에 갓 입문한 뉴비 팬들이 하나같이 한 말이 있다. "어떻게 한 시즌에 144경기나 해?" 17년째 야구를 보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 당연한데 그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지점이었다. 다른 프로스포츠 ─ 축구, 농구, 배구 등 ─ 에 비해서 야구가 훨씬 경기 수도 많고 시즌 전체 기간도 길다. (물론 야구팬 입장에서 144경기도 그렇게 길지 않다.) 야구에 흥미가 없는 어머니도 내가 야구를 볼 때마다 '그 많은 경기 다 보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니?' 물으실 정도인데, 그 시간에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라는 뜻을 애써 모른척하고 '그렇죠' 답하곤 한다.


한 경기로 범위를 좁혀봐도 그 어떤 스포츠보다 긴 경기 시간을 자랑한다. 올 시즌 KBO에서 피치클락이니 뭐니 하면서 경기시간 단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평균 경기 시간은 3시간 14분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3시간 20분을 넘는 팀이 바로 우리 자랑스러운 롯데 자이언츠... 늦게 이기고 늦게 지는 팀컬러는 여전하다. 올 시즌 최장시간 경기는 지난 6월 25일 기아-롯데 전, 5시간 20분이었다. (최장 2,3위도 롯데인 건 좀 웃기다. 사실 안 웃기다.) 시간제한 없이 양 팀 투수들이 어떻게든 도합 54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야 끝나는 종목 특성상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줄여보려는 KBO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기 때문에, 직접 뛰는 선수들도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팬들도 경기가 길어질수록 좋을 건 없으니까.




하루 3시간, 1년에 144경기, 자그마치 400시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을 이깟 공놀이에 투자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다. (모든 경기를 풀로 다 보진 않으니... 그래도 1년에 300시간은 될 것 같다.) 보는 사람을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종목 특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 속에 삶의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 정말이지 올시즌만 해도 참 많은 '', '', '', ''을 느꼈다. 단순히 경기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10개 팀의 수많은 선수들의 서사가 얽혀있는 게 바로 프로야구의 매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나에게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 종목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희喜

타 팀 팬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 '로나쌩'은 '로떼만 나오면 쌩큐', 즉 유난히 롯데에 강한 선수를 말한다. 최근 들어 가장 강력한 '로나쌩' 멤버는 KT 위즈의 고영표. 2021~2023 시즌 롯데전 성적을 보면, 9경기 5승 2패에 평균자책점이 무려 0.98이다. QS 2번, QS+ 5번, DS 1번, 그리고 완봉승까지. KT 이강철 감독이 롯데전에 고영표를 여러 번 표적등판시킨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 일로 많은 롯데 팬들의 미움을 샀다.)

하지만 올해는 180도 다른 모습. 6월 첫 맞대결에서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황성빈부터 다섯 타자 연속 안타를 치며 2회까지 6득점으로 완승을 거뒀고, 7월과 8월에도 각각 5.2이닝 12안타 4득점, 4이닝 12안타 8득점을 기록하며 고영표 포비아를 완전히 극복했다. 특히 레이예스는 고영표 상대 10타수 8안타 1홈런 5타점! 롯데 팬으로서 아주 통쾌한 복수를 해준 타자들이 너무 기특하다. (이 기쁨을 이강철 감독님께 바친다! ^^) 어쩌면 한번 더 만날 수도 있는데, 그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우리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보자고!

사진출처 : 롯데 자이언츠


#로怒

롯데 자이언츠의 나균안은 포수 시절 부족한 실력으로 많은 질타를 받다가 투수 전향 이후 안정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순조롭게 팀에 정착했다. 올해 초에 사생활 이슈(로 치부하기에 불륜은 너무 큰 잘못이지만 어쨌든) 때문에 욕은 좀 먹었어도 여전히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생각하고 잘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즌 내내 부진하더니, 6월 25일 기아전을 앞두고 선발투수 나균안이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진 것이 밝혀지면서 많은 팬들의 분노를 샀다. 규정상 부상 외 사유로 당일 선발투수를 바꿀 수 없어 일단 등판했지만, 1.2이닝 7피안타 6사사구 8실점. 개인사도 눈감아주고 부진해도 꾸준히 기회를 줬는데 이런 식이라면 어느 구단이 가만히 있을까. 구단에서는 바로 30경기 출장 정지 및 사회봉사 40시간 징계를 내렸다. 솔직히 너무 가볍다 생각했는데, 업계 종사자들이 입을 모아 이례적이라고 하는 걸 보면 꽤 중징계인가 보다. 최근 1군에 다시 복귀했는데, 이제는 팀을 위해 '야구로 속죄'하길 바란다.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애哀

이번에는 다른 팀 선수의 이야기다. 5월 9일 한화전에서 이글스의 젊은 유망주 투수 장지수가 마운드에 오른 건 롯데가 10-5로 이기고 있던 7회말, 추격조 역할을 맡아 이닝을 잘 끝냈지만, 사건은 그다음에 터졌다.

8회에 다시 올라온 장지수는 3루타, 실책 출루에 연속안타를 맞으며 흔들렸다. 하지만 당시 한화 최원호 전 감독은 투수를 교체하지 않았고, 4실점을 더 하고 무사 만루가 되어서야 강판되었다. 뒤에 나온 투수가 만루홈런을 허용하면서 장지수의 기록은 1이닝 7실점. 상대 팀인 내가 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무너지는 장지수의 모습은 정말 안타까웠다. 특히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 다음 투수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건네고 벤치에서 자책하며 우는 모습은 한 사람의 야구팬으로서 속상했다. 이후 최원호 전 감독에 대한 비판은 더 거세졌다.

사실 벌투 논란(대표적으로 송창식)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오히려 감사했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깨달음을 얻고 더 성장했다고 한다. 장지수도 이날을 발판 삼아 더 성장했으면 좋겠다.



#락樂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 볼 때, 올시즌 최고의 히트상품은 마황, 롯데의 황성빈이다. 캡틴 전준우 외에 내가 유일하게 유니폼에 이름을 마킹한 선수다. 시즌 초까지만 해도 주로 대주자로 나왔고, 열정이 과한 탓에 타 팀 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황성빈은 주무기인 빠른 발과 더불어 타격이 좋아지면서 점차 존재감이 커졌고, 분위기를 바꾸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많은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동안 롯데에서 보지 못했던 그의 허슬 플레이는 타 팀 팬들에게도 인정받았고, 결국 KBO 올스타전 베스트12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2024 KBO 올스타전은 황성빈의 무대였다. 3회 말 황성빈은 배민 주문 알림음과 함께 '배달의 마황' 헬멧을 쓰고 스쿠터를 타며 등장했다. 과거 발만 빠르다는 이유로 '딸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황성빈은 가장 유쾌한 방식으로 승화했고, 특유의 빠른 발로 내야 안타를 만든 황성빈은 1루에서 '배달 완료' 종이를 펼치며 팬들의 폭발적인 환호를 끌어냈다. 주자 황성빈은 모두가 기대했던 '뛸까말까' 퍼포먼스까지 선보이며 시즌 초 기아 양현종과의 논란을 웃음으로 승화했는데, 운 좋게도 마운드 위에 있던 NC 김영규가 양현종과 같이 안경을 쓴 좌완투수인 점이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높였다.

사진출처 : 롯데 자이언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성빈은 다음 이닝 수비를 앞두고 '신속 배달' 철가방을 들고 있다가, 롯데 박세웅이 마운드에서 손짓을 하자 직접 뛰어가 로진을 배달했다. 박세웅이 돈을 건네고 황성빈은 거스름돈을 꺼내려 하자 박세웅이 '넣어둬' 하는 시늉을 했고, 이때 황성빈의 표정이 너무 리얼해서 빵빵 터졌던 기억이 있다. 등장에만 공을 들이는 대부분의 선수들과 달리 준비성과 완성도를 모두 갖춘 황성빈은 결국 최우수 퍼포먼스 상을 받고 활짝 웃어 보였다. 후반기 들어 주춤하긴 하지만, 그래도 황성빈은 롯데에 없으면 안 될 선수가 되었다. 자칫 한화로 트레이드될 뻔한 일도 있었지만, 앞으로 롯데 자이언츠에서 더 많은 '마성'을 뽐내주길 바란다.




2024 시즌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정규편성 경기는 끝났고, 이제 우천취소나 미편성된 잔여경기만 남았다. 유난히 많은 경기가 취소되었던 롯데가 잔여경기가 제일 많은데, 유불리를 따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가을야구에 가든 못가든 자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점은 팬으로서 기대할 수밖에 없다. 1위 기아, 2위 삼성, 3위 엘지의 3강 구도는 사실상 확정이지만 4위 두산 베어스와 8위 SSG 랜더스의 승차는 불과 3.5경기(9/5 기준). 과연 정규시즌이 종료되는 9월 27일에 웃는 팀은 어디일지, 전혀 모르겠다. 역대급 순위싸움이 벌어지는 2024 시즌의 끝이 다가온다. (롯데 자이언츠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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