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보증재단 직원이 콘트라베이스를 못 숨김 2화

by 설다람

1년이 지났고,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료함에 적셔진 정신과 몸으로 책상을 비비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결혼해요.”

옆 부서에서 일하는, 얼굴만 아는 직원이 청첩장을 내밀었다. 잘 아는 사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모두에게 청첩장을 돌리는 게, 이곳의 룰이었다. 주는 사람도 악의는 없었다. 돈을 챙길 생각으로 청첩장을 나눠주는 악인은 드물다. 이번 것까지 합치면 입사 후 받은 청첩장은 10개였다. 그동안 축의금 하한선은 인플레이션에 맞춰 착실하게 올랐다.

분홍색 청첩장을 열자 잘생긴 신랑과 예쁜 신부가 서로를 껴안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손이 델 듯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행복해 보였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 행복.

“축하해요.”

건조하게 현예가 말했다.

“현예 씨도 곧 청첩장 돌려. 축의 내가 거하게 할게.”

팀장이 쾌활하게 농담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종종 생각 없이 말했다. 현예는 겸연쩍게 웃고는 답하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 11시

가장 좋은 시간대였다.

예식장은 수도 한복판에 있는 고급 호텔이었다. 같은 월급을 받는 처지에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타인의 능력을 빌었거나, 재테크를 잘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직장 동료들을 만났고 함께 신부에게 인사했다. 약간 붉어진 신부의 뺨에서 달뜬 감정이 느껴졌다. 식장으로 들어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와, 안으로 들어갔다. 낮은 조도의 식장엔 웨딩아일을 따라 촛불이 켜져 있었다.

단상 위에서 돌아가던 스냅사진 영상이 꺼졌고, 장내가 조용해졌다.


사회자가 개식을 선언하자 불이 완전히 소등되었다. 먼저 신랑이 입장했다.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신랑은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뒤이어 결혼식의 꽃인 신부가 들어올 차례였다. 사회자가 뜸을 들이다가, 신부 입장을 외쳤다.


눈처럼 새하얀 신부가 천천히 촛불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눈부신 조명은 한 사람만을 비추었다. 모든 시선이 신부에게 모였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언제나 신부였다.


그러나 현예의 귀에, 식을 시작하면서부터 주인공의 자리를 침범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잔하게 바닥에 깔리는 피아노 소리였다. 넘치지 않게, 담백하게 선율을 가다듬는 터치. 지금껏 어느 결혼식에서도 이런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Bud Powell의 ‘Time Waits’였다.


잼은 물론, 공연곡으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이다. 앨범곡으로 녹음된 것도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현예가 아는 다른 버전은 Emori Yoshiaki 쿼텟이 연주한 버전으로, 탁한 뮤트 트럼펫이 선율을 이끄는 담백한 구성이 일품이었다. 지금은 원곡과 같이 피아니스트의 오른손이 멜로디를 이어 나갔다. 깔끔했다. 기본기가 달랐다. 고급 호텔이라 그냥 음대생이 아니라, 진짜 연주자를 섭외한 것일까, 궁금해하며, 현예는 피아노 자리를 바라보았다. 연주자는 눈을 감고, 음악을 음미하고 있었다. 자신이 펼쳐내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스스로도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봤는데.


현예가 기시감을 느꼈을 때, 연주자가 눈을 떴다. 청록색 눈동자가 현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뷔페에서 두 번째 접시를 테이블에 놓았을 때, 옆자리에 피아니스트가 앉았다.

“여기서 뵙네요. 선임님”

전 ‘Bebop In Pastel’ 사장 주서규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요. 피아노를 치셨군요.”

“그냥 음악 노동이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는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지난 사업 건은 죄송하게 되었어요.”

“그걸 왜 선임님이 사과하세요. 제가 부족한 탓이죠. 걱정 마세요. 꼭 다시 할 거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쥔 듯한 눈빛으로 서규가 말했다.

다짐한다고 사업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짐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기어코 하고 말 것 같았다.

“재즈 클럽 말고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수요가 낮잖아요. 직접 운영하셨으니, 더 잘 아시겠지만.”

“돈을 벌려고, 재즈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특히 한국에서는. 일종의 사명감이죠. 재즈 전도사가 되어, 이 땅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더 재즈를 듣게 하는 것. 그게 제 목표예요.”

어리석게 들렸다. 그 말을 너무도 진지하게 하니, 어색했다. 비현실적인 믿음.

“커피 안 드신다고 하셨죠?”

접시를 모두 비운 것을 보고, 서규가 물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뭘 주로 드세요.”

“수정과요. 덜 달고, 매운 거.”

“뭐든 흔하지 않은 취향이네요. 가는 김에 가져오려 했는데, 여긴 없는 것 같아요.”

“드문 취향은 아니에요. 수정과가 드물지.”

사무적인 어조로 답했다.


하루가 가고, 계절이 갔다. 두어 번의 결혼식이 더 있었고, 그날 같은 피아노 연주는 듣지 못했다. 물가상승률을 간신히 앞지르는 정도의 임금 인상과 함께, 그 해도 무탈하게 넘어갔다.


화면 속에 무수히 많은 숫자와 텍스트가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의미 없는 시각적 정보였다. 업무를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뇌를 만들었고, 뇌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과 키보드가 일했고, 식사조차도 업무의 일환이었다. 남은 삶도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 종이를 구겨서 씹어먹는 기분으로, 매일매일을 씹어먹기.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수능이라는 긴고야를 쓴 머리로 공부만 했던 날들. 양치를 하며 바라본 거울에 고등학생의 자신이 보였다. 순간 컵을 던져 거울을 깨고 싶었다. 이런 미래 속에서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어떤 미래를 바랐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말 바라긴 했었는지도.


“신 선임은 군말 없어서 좋아.”


새로 들어온 신입을 박살내면서 팀장이 말했다. 두 사람 모두를 깔아 뭉개는 발언이었다. 지난 번 신입은 한 달만에 퇴사했다. 이번 신입도 비슷할 것이다. 현예가 군말 없는 이유는,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언어를 잊었기 때문이다. 소리 낼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현장 실사가 있어 북현동으로 나왔다. 집 근처라 실사를 마치고 곧바로 퇴근할 예정이었다. 대출을 신청한 곳은 은백 미용실이라는 허름한 미용실로, 까만 앞치마를 두른 백발 노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가 이제 내 목숨이야. 문 닫으면, 비실비실거리다 가버릴지도 몰라. 단골도 있으니,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해. 잘 좀 봐줘요.”

산전수전은 다 겪은 듯한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간절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코 지지 않을 목소리였다.

늘 하던 대로, 매출을 확인하고, 사업장 운영 상태를 보았다. 운영 의지는 확실했으나, 지속적으로 경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근처에는 상권이라 할 만한 곳도 없었다. 노인이 말하는 단골도 주인과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그런 미용실은 대개 동네 사랑방으로 운영되다, 사업자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이 집은 그러기도 전에 위기를 맞은 것이고, 사업자는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것이다.

어떻게든.

“직원 양반.”

간판 사진을 찍고 가려는 현예를 노인이 불렀다.

“여기 우산 하나 챙겨 가. 저녁부터 비 온다고 하더라고.”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현예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꼭 돌려주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은 우산은 빌려주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했다.

혼자 쓰기엔 지나치게 큰 장우산이었지만, 폭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라면 신발은 물론 바지도 모두 젖을 테다.

고민하던 현예는 눈앞에 보이는 가게 차양막 아래로 들어갔다. 폭이 좁긴 해도, 비는 제대로 막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로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가게 문 너머에서 나는 소리였다. 안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우산을 털고, 문 가까이 갔을 때, 차양막에 가려져 있던 간판이 나타났다.


‘Bebop in Pastel’


검고 낡은 철문, 영락없는 재즈 클럽 입구였다. 현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예를 맞이한 건 비처럼 쏟아지는 스네어 타격음이었다. 민트색과 분홍색이 사선으로 갈라진 후드를 입은 여자가 모자를 덮어쓰고 드럼을 치고 있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어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외모와 다르게 스틱에 실린 힘은 강했다.

라이브 연주를 하는 건가 했는데, 연주자는 드러머 뿐이었다. 카운터 테이블에 앉은 현예는 주문하려고 했지만,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현예는 가만히 앉아, 연주에 집중했다. 재즈가 아니라 펑크 드럼이었다. 돋보이는 것은 속도였다. 드러머는 가공할 만한 속도로 16분음표와 32분음표를 오가는 롤을 쏟아냈다. 왼손은 스네어에서 뮤트된 타이트한 사운드로 롤을 유지했고, 오른손은 탐과 하이햇을 번갈아 휩쓸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정밀하게 박자를 잘게 쪼갰다. 모자가 흘러내렸고, 진한 검은 머리가 스틱의 빠른 진동과 함께 미세하게 흔들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롤을 멈추고 하이햇을 닫으며 브레이크를 주었다. 일순간 고요해진 공간은 진공으로 압축된 듯 팽팽했다. 양팔을 크게 들어 올린 연주자는 양 라이드를 내리치려다, 정지했다.

“손님?..이세요?”

스네어를 때릴 때 보여준 패기와는 다른 말랑한 톤으로 드러머가 물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확신 없이 현예가 대답했다. 연주에 깊게 빠져, 이곳에 왜 자신이 들어왔는지조차 잊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메뉴판 드릴게요!”

드러머는 잽싸게 주방으로 뛰어갔다.

“천천히 하셔도 돼요.”

어딘가 부딪쳐 고꾸라질 것 같은 몸동작에 현예가 말했다. 드러머 귀에는 들리지 않은 듯했다. 부엌문을 열다 머리를 찧고 말았으니. 메뉴판을 들고나온 드러머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현예는 천천히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수정과(덜 달고, 매워요.)


문이 열렸고, 음악이 재생되었다.


‘In Walked Bud’


“선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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